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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서관 기행]지혜의 집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지혜의 집>

by 여행하는가족

중동지역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운 편에 속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는 먼 장소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종교와 문화의 차이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랬던 중동을 우리 곁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게 만든 곳이 있다. 바로 두바이다. 사실 두바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나라가 아닌,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라는 국가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토후국* 중 한 곳이자 두바이 토후국의 중심 도시다. 미래 세상을 연상시키는 미관 덕분에 매년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관광허브로 자리매김한 이곳. 그러나 이 도시와 경계를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아랍에미리트의 또 다른 매력을 뽐내는 토후국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 우리가 찾아갈 곳은 두바이의 이웃, 샤르자(Sharjah)다.


*토후국(Emirate): 영국의 보호와 감독하에 지배자로 군림하던 세습 전제 군주인 토후가 이끄는 국가


단아한 모양새를 한 샤르자 지혜의 집


아랍에미리트 전통과 문화의 수도, 샤르자

샤르자 토후국의 수도인 샤르자는 아랍에미리트 전체의 수도 역할을 담당하는 아부다비와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두바이에 이어 이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크고 중요한 도시다.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차로 20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 할리파가 자리한 두바이 도심에서는 30분이면 닿을 정도로 지척이지만 풍경은 두바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샤르자에 가까워질수록 전통미를 발산하는 건물들이 자주 눈에 들어오고 전통의상인 아바야나 칸두라*를 차려입은 이들을 만날 가능성도 커진다. 아닌 게 아니라 샤르자는 아랍에미리트의 전통과 문화의 수도를 표방하는 곳이라고 한다. 문화와 예술 전반에 관심이 지대한 셰이크 술탄 빈 모하메드 알 까시미 국왕 덕분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문화시설을 다수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지난 2019년, 샤르자의 문화적 행보에 힘을 실어준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 도시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된 것이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2002년), 레바논의 베이루트(2009년)에 이어 아랍 세계에서는 세 번째다. 샤르자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을 건축했는데 그곳이 바로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이다.


*머리부터 발목까지를 가리는 아랍에미리트 지역의 전통의상으로 여성 의상은 아바야, 남성 의상은 칸두라라고 부른다.


책을 빌리기 위해서는 유료회원으로 가입해야 하지만 열람실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지혜의 집, 도서관의 이름에 담긴 의미

도서관의 명칭은 건물이 들어선 장소의 지명이나 주요 소장 도서의 장르를 따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혜의 집(House of Wisdom)은 명판부터가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샤르자를 대표하는 이 도서관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기원후 8세기에서 13세기, 이슬람 세계를 이끌던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는 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운영되던 도서관이 있었다. 지혜의 집(House of Wisdom), 또는 바그다드 대도서관(Grand Library of Baghdad)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에페소스의 켈수스 도서관 등과 더불어 고대 시대를 대표하는 도서관 중 하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전을 번역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술기관 역할까지 담당했으며, 당시 다뤄진 지식의 범위는 이슬람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어를 익힌 그들은 서구에서 탄생한 고대 유산들을 아랍어로 번역, 정리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수 세기 후 이번에는 서구의 학자들이 아랍어를 배워 지혜의 집에 축적되어 있던 자신들의 역사를 거꾸로 수입해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학문이 이슬람 세계에 빚진 것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안타깝게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대 바그다드에 있던 지혜의 집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많은 도서관들이 이 공간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정신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알 아인의 오아시스를 모티프로 하여 탄생한 중앙 정원
사방으로 뚫린 큼지막한 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이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안팎으로 열려 있는 지혜 교류의 장

샤르자 지혜의 집도 고대 바그다드에 존재했던 도서관의 정신을 계승한 곳이다. 이곳은 도서관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학습 공간의 기능뿐 아니라 서로 다른 아이디어와 문화를 주고받는 문화의 중심지 역할까지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건물의 생김새에서부터 열린 마음이 잘 드러난다. 런던, 홍콩, 베이징 국제공항의 설계를 담당했던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Foster + Partners)가 디자인한 도서관 건물은 언뜻, 외부 환경과의 조화를 강조하는 우리네 옛 한옥을 닮은 것도 같다. 단아한 모양새의 2층 건물에는 사방으로 큼직한 창문이 나 있어 그곳을 통해 주변의 자연환경이 도서관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아랍에미리트의 대표적인 오아시스를 모티프로 해 만들었다는 건물 중앙 정원에서는 뚫려 있는 상층부를 통해 내리쬐는 햇살을 만끽할 수도 있다. 12,000제곱미터에 이르는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자연의 빛을 최대한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설계한 덕에 인공조명의 힘은 최소한만 빌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내부에서 외부로 또 외부에서 내부로 물 흐르듯 섞여 드는 빛과 풍경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멋진 공간이다. 건물 둘레에 조성된 정원도 단정하다. 중동의 자연환경을 보여주는 정원과 도서관 건물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조성된 일본식 정원은 그 길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좌) 1인용 공간이 마련된 열람실의 풍경, (우) 중앙 정원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마련된 소규모 회의실


소장자료, 그리고 다채롭게 구성된 특별한 공간들

지혜의 집은 30만 권 이상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그중 20만 권가량이 디지털 형태이고 소장목록에는 아랍어와 영어 이외의 언어로 된 자료와 점자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1층에는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 진행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엔 3천 여 권의 책들이 어린이 독서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이용 가능한 공동 열람실 이외에도 여성 이용자들만을 위한 공간, 크고 작은 모임을 위한 회의실과 다목적홀, 전시장 등의 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에서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음식을 파는 곳은 없지만 다행히 도서관 내부에 깔끔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이용객들의 편의를 돕는다.


이용객들을 위한 도서관 내 편의시설. 왼쪽이 레스토랑이고 오른쪽이 카페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에스프레소 북 머신'이었다. 누구나 원고만 준비되어 있다면 마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만큼 짧은 시간 안에 책을 만들 수 있는 기계다. 담당자에 따르면, 전 세계 어떤 언어라도 모두 인쇄가 가능하며 한 번에 최대 200권의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도서관이 보유한 출판사 네트워크를 통해 실제 출판이 이뤄지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절판도서도 이 기계로 제본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저작권 문제는 이용자가 도서관에 저작권료를 지불하면 도서관이 그것을 저작권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해결 가능하다. 지혜의 집에서는 정기적으로 북메이킹 워크숍 등의 활동도 진행된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꿈꾸는 이라면 도서관 웹페이지에 올라오는 이벤트 일정을 꼼꼼히 확인해 볼 것을 권한다.


(좌) 에스프레소 북 머신, (우) 샤르자 지혜의 집에서는 북메이킹 워크숍을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된다.


확대되는 한국과 샤르자 간 문화교류

지난 6월, 서울의 코엑스에서 진행된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은 샤르자였다. 그리고 오는 11월 1일부터 12일까지 아랍에미리트 샤르자에서 진행되는 샤르자국제도서전에는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한다. 1982년부터 시작된 이 역사 깊은 도서 축제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문학번역원 관계자에 따르면, 이 행사를 위해 정호승 시인과 김승희 시인, 동화작가인 황선미, 소설가 김언수, 김애란, 배명훈이 샤르자를 방문해 지혜의 집 등지에서 국내외 독자들과 직접 만날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해외 홍보를 위해 활동하는 세종학당재단도 한국과 샤르자 정부 간 문화교류 강화를 위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미 아랍에미리트에서 세종학당이 운영 중이지만,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샤르자에 중동 지역 거점 세종학당*을 신설, 운영한다니 양측의 더 활발하고 폭넓은 문화교류를 기대해 봐도 좋을 것이다.


*거점 세종학당: 전 세계 세종학당을 권역별 특성에 맞게 효과적으로 지원, 관리하기 위해 재단이 직접 설치, 운영하는 지역 본부 개념의 세종학당


Gerry Judah, <The Scroll>


시대를 넘나들며 전해지는 지혜의 힘

지혜의 집 외부 정원에는 영국의 예술가, 게리 주다(Gerry Judah)가 만든 거대한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두루마리(The Scroll)>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고대의 두루마리가 회오리 형태로 둥그렇게 말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모습을 띠고 있다. 과거에는 종이를 얻는 일도, 그 위에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넣는 일도 굉장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리라. 그 마음과 손길을 통해 인류는 경험과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해왔고, 두루마리로 시작된 그것은 종이에 인쇄된 책과 이제는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형태로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안에 담긴 지혜를 개인의 힘만으로 후대에 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곁에는 다행히 도서관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모여 경험을 나누고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축적된 지혜를 다음 세대로까지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도 지혜의 집이 진정한 지혜의 공간으로서 제 역할을 지속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기고처] 월간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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