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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서관 기행]켈수스 도서관

튀르키예 셀추크 <켈수스 도서관>

by 여행하는가족

꿈 많은... 소년?

“내가 열두 살 때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야!”


좋아요. 조금 과장을 했다고 칩시다. 아무리 그래도 조선시대로 치자면 손주를 얻고도 남았을 나이에 소년 시절의 꿈을 이야기하는 남자라니. 내일모레 삼십 대 중반의 말간 얼굴에 나는, 감동을 받고 말았다. 그 해맑은 ‘곧 중년’이 바로 당시의 내 남자 친구, 그러니까 나와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를 약속한 지금의 남편이다.


나는 좋게 말하자면 까다롭지 않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둔한 스타일이긴 하다. 음식도 웬만하면 다 맛있어서 엄마는 요리를 하시면서도 나에게는 한 입 먹어보고 소금을 더 칠지 아니면 설탕을 더 넣을지 말해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 큰딸은 뭐든 맛있다고 하니까.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도 아주 싫은 사람도 극히 드물었고 그런 이유로 난, 대부분의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딱히 불만이 없었으니 현실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왔다는 이야기. 그래서였을까? 독신주의자는 아니었대도 서른이 넘어서까지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싱글 생활도 만족스러운데 굳이 결혼이 필요할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 했던가. 이십 년 전 소망을 진지하게 고백하는 모습에 반한 나는 만난 지 삼 개월밖에 안 된 이와 더불어 결혼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순수한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아, 기억력이 예사롭지 않은 이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장소는 딱 한 군데가 아니었구나.


“여기는 내가 열한 살 때부터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곳이었어.”


“우리 저기엔 반드시 다녀오자. 내가 열네 살 여름방학 때 언젠가는 꼭 다녀오겠다고 결심한 곳이거든.”


튀르키예 여행도 그의 꿈의 목록 덕분이었다. 우리 부부는 다른 어떤 것보다 책 욕심이 많아 집에서 가장 전망 좋은 방 하나를 서재로 꾸미고 그곳을 책으로 가득 채워두었다. 책장의 반은 남편의 책이 나머지 반은 내 책이 차지하고 있는데 본인 몫의 서가에 꽂아둔 것이 대부분 역사와 지리 관련 도서일 정도로 남편은 그 분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각별하다. 그런 그가 활자로 숱하게 접해 왔던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배경이자 신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에페소스 유적지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바람에 결국 우리 가족은 튀르키예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에페소스 유적의 크레테스 거리. 메인도로 격인 이 길을 따라 유적을 살펴보았다
에페소스의 오늘 안에는 과거의 시간들이 놀랍도록 싱싱하게 펄떡이고 있었다


튀르키예 최고(最高)의 고대 그리스 로마 유적, 에페소스

튀르키예 남서부, 이즈미르주의 셀추크(Selçuk) 지역에 자리한 에페소스 유적(Ephesus, Efes)은 이 나라에 산재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유적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힌다. 그간의 경험을 뒤돌아보건대 고대 유적지라고 알려진 곳에 가보면 허허벌판에 기둥 몇 개, 또는 바닥 일부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어 햇볕에 바래가는 표지판에 적힌 설명을 읽고서야 아, 여기가 이런 곳이었구나 겨우겨우 깨닫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불허전이라더니 과연, 에페소스는 달랐다. 전성기에는 무려 2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 원래 도시 규모의 1/4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낮에 유적을 둘러보는 일이 고문처럼 느껴질 정도로 면적이 광활했다. 게다가 단순히 넓기만 한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건물이며 조각품들의 상태가 놀랍도록 훌륭해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3,000년에 육박하는 시간을 단박에 거슬러 올라가 고대인들이 누리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정도였다. 기원전 11세기말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인들의 식민 도시가 된 이래 초기 그리스 문화가 융성했었고 이후에는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 문화가 번영했던 터전이 바로 여기, 에페소스라 했다. 더불어 이 지역은 기독교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손꼽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도 여행을 떠났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에페소스(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옥중 서신을 보냈으며 그것이 바로 신약의 에베소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사도 성 요한이 말년의 성모를 돌보며 선교활동을 이어갔다는 성지, 동정 마리아의 집(Meryemana Evi, House of the Virgin Mary)도 자리하고 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에페소스에 다녀온 튀르키예인 친구 가족은 한낮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유적을 둘러보는 것은 절대로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니 반드시 오전 일찍 방문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그곳에는 입구가 두 개 있는데 그중에서 반드시 마그네시아 게이트(Magnesia Gate/ Upper Gate)라 이름 붙은 언덕 위쪽 입구에서 출발해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야 힘이 덜 빠질 것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그것을 참고해 우리 가족도 마그네시아 게이트로 향하긴 했으나 그들만큼 부지런하지 못했던 까닭에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풍경 좋은 카페에 들러 모닝커피까지 한 잔씩 나눈 후 솟아오를 대로 솟아오른 태양이 내뿜는 열기를 이마로 맞받아쳐야 할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늘을 차지했구나. 부럽다, 고양아.


구경거리가 넘치는지라 발걸음을 마냥 재촉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곳이었다. 문제는 그 드넓은 유적지에서 햇볕을 피할 장소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는 것.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드리운 곳이라면 사람이든 고양이든 누군가는 꼭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수리가 타버릴까 무서워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모자를 눌러쓰고 있던 우리 가족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그늘진 구석자리 하나를 찾는 데 성공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모자까지 벗어버리고 나니 그제야 시원하게 달려드는 바람이 느껴진다. 여유를 되찾은 우리는 오래전 이 땅에 살던 이들이 머물던 집이며 인고의 시간을 거쳐 깎아 냈을 조각상들, 오늘날의 화장실과 너무나도 비슷해 기어코 탄성과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공용 화장실과 고대인들의 바람이 담긴 신전과 원형 경기장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다시금 담아 보았다. 에페소스의 오늘 안에는 과거의 시간들이 놀랍도록 싱싱하게 펄떡이고 있었다.


자, 이제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장소에 거의 다 도착했으니까. 그늘이 선사하는 달콤한 휴식 안에서 챙겨 온 물을 마시고 숨을 고른 우리 가족은 끙차! 에너지를 긁어모아 다시 한번 땡볕 아래로 나섰다. 그토록 눈에 담고 싶었던 켈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이 바로 저 앞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켈수스 도서관이 바로 저 앞이다.


켈수스 도서관

로마 시대에 켈수스 폴레마에아누스(Tiberius Julius Celsus Polemaeanus)라는 인물이 살았었다. 아시아주의 총독을 맡기도 했을 정도로 직업적으로 성공했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아킬라 폴레마에아누스(Tiberius Julius Aquila Polemaeanus)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도서관을 짓는다. 지하에는 아버지의 무덤을 안치하고 그 위에 거대한 기둥들이 받치고 있는 웅장한 건물을 지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리고자 한 것이다. 당시, 12,000권 이상의 파피루스를 소장했다던 이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르가몬 도서관에 이어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도서관이었다고 한다. 2세기 초 완공된 이래, 에페소스 시민들을 위한 공공도서관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이야기에 시나브로 나의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내달린다. 열람실로 이용되었다던 1층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의 세계를 좇아 모여든 에페소스인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아 귀하디 귀한 책을 조심스레 뒤적여 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1970년대에 재건된 도서관의 파사드와 거대한 기둥 일부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3세기 중반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도서관의 내부가 소실되었고 이어 10세기와 11세기에 연달아 일어난 지진 때문에 남아 있던 건물의 입구 또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도서관 입구 앞 계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길래 우리 가족도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켈수스 도서관이 누렸던 과거의 영화를 희미하게 더듬어 볼 따름이었다.


꿈 많은 만년 소년

중년의 탈을 쓴 꿈 많은 소년과 함께 산 지 이제 곧 십이 년이 된다.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꿈이 워낙 많으신 분이라 나는 더 이상 그의 소망을 맞닥뜨릴 때마다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화수분과도 같은 꿈의 목록 덕분에 우리 가족이 크고 작은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고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까지 어린 시절의 꿈을 잃지 않아 주어서, 그리하여 가보고는 싶었지만 과연 언제쯤 가볼까, 아니, 정말로 가볼 수나 있을까 싶었던 세상들을 진짜로 내 눈앞에 데려다주어서.


덕분에 진짜로 만나보았네. 고대의 켈수스 도서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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