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발터(Edgar Valter)는 에스토니아의 아동문학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동시에 풍자 화가로 55년이라는 기간 동안 25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작가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포쿠라마트(The Poku Book, Pokuraamat) 시리즈인데 여기에서 포쿠(poku)란 에스토니아 남부 습지에서 자라는 잔디 더미를 뜻한다고 한다. 언뜻 보면 덥수룩하게 풀어헤친 금발처럼 보이는 그것을 보고 작가는 긴 머리카락 너머 숨어 있는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과 작은 몸을 지닌 존재들을 상상했었나 보다. 이렇듯 작은 상상에서 출발한 동화는 자연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의 공존을 그리는 커다란 이야기로 확장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에스토니아인들로부터 널리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탈린 구시가지 풍경
다시, 탈린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더불어 흔히 ‘발트 3국’으로 구분되는 에스토니아(Estonia)는 발트해 연안에 자리 잡은 나라로 수도는 탈린(Tallinn)이다. 탈린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로 특히나 유명한데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탈린 땅을 두 번째로 밟던 날, 나는 남편, 그리고 갓 네 돌을 넘긴 우리의 아이와 함께였다. 여행을 앞두고 오래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찍었던 탈린 구시가지의 풍경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꿈처럼 아름다운 그 도시는 긴 세월 동안 내 마음에 박제되어 있으면서 언제 다시 자기를 찾아올 거냐 묻고 또 묻고 있었다.
다시금 탈린항에 도착하던 날, 하늘은 야속하게 비를 쏟아냈다. 여행하기 적합한 날씨는 아니었으나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이틀. 배 안에서 날이 개기만을 기도할 수는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섰다. 아이가 아직 어리고 이동해야 할 거리가 짧지 않을 듯해 출발 직전까지 유모차를 가져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비도 오는데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유모차까지 끌고 다닐 자신이 없어 결국 우산만 챙겨 들고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하늘이시여!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항구를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을 한 아이가 두 팔을 양쪽으로 쫙 벌리더니 나와 남편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안아주세요!”를 주문처럼 외기 시작한 것이다. 안아주떼요, 엄마, 아빠, 안아주떼요!!
아마도 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머리통부터 우비를 뒤집어쓴 모습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사실 아이는 부모가 가자니까 따라 나온 것이지 구시가지고 신시가지고 안 가도 그만이었을 텐데... 타의에 의해 길을 나선 꼬마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번갈아 안고 걷기로 했다. 항구에서 구도심에 이르는 길은 내 기억 속에서보다 멀고도 험난했다. 언덕 위로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시프스의 형벌처럼 가도 가도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은 이제 제법 묵직해진 아이를 두 팔로 끌어안고 나머지 한 명은 그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우산 하나로 머리통 세 개에 내려 꽂히는 비를 막아내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관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배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제껏 온 길이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찰나, 아! 저것은!? 영영 가 닿지 못할 것만 같았던 팻 마가렛 타워(Paks Margareeta, Fat Margaret Tower)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타워 옆 문만 통과하면 구시가지가 시작되고 거기서부터는 마치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마을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지가 눈앞에 보이니 힘이 더 빠진다. 두 다리는 후들거리고 점점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는 아이를 안은 두 팔은 당장에라도 어깨에서 뽑혀 나올 기세다. 없던 허리디스크까지 발병할 것 같은 상황에서 뭐? 중세시대? 그래, 중세시대도 좋고 다 좋다. 그런데 중세의 귀족이 아니라 농노가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얼까.
그때였다. 한시라도 빨리 앉을 곳을 찾아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나의 눈에 간판 하나가 들어왔다. 여기에서 잠깐 삼천포로 빠져보자면, 탈린 구시가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구경거리 중 하나는 바로 간판이다. 문맹률이 높았던 과거, 글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간판의 생김새만 보고도 아, 여기에서는 무엇을 팔고 저기에서는 이러저러한 것을 할 수 있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려고 각자 영위하는 업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으로 새겨 가게 밖에 내걸었던까닭에 재미있는 모양새를 한 간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츠 모양의 조각품이 걸린 가게에서는 구두를 팔고 돼지와 닭이 새겨진 그림을 건 가게에서는 고기를 파는 식이다. 그런데 가만 보자, 책을 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새겨진 간판이라… 혹시 도시관, 혹은 서점일까? 그렇다면 그 안에 의자도 있겠지? 희망에 부푼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탈린 구시가지에 자리한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에서는 이 나라의 아동문학과 관련한 모든 것을 만나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
그래! 여기다, 여기!!!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Eesti Lastekirjanduse Keskus, The Estonian Children's Literature Centre)라는 이름을 내건 그곳은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공간이라 했다. 자국민이 아니어도, 회원이 아니어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이야기에 드디어 두 팔의 자유를 얻은 성인 두 명과 드디어 제 발로 걷겠다는 의지가 생긴 아동 한 명은 센터 안으로 성큼 들어가 보았다. 아직 관람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아동문학의 전지전능한 힘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오랜 기간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오던 에스토니아는 20세기 초 독립을 한 이후, 이어 구소련에 강제로 소속되었다가 비교적 최근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독립을 이룬 나라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1933년에 시작되었다는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의 역사도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탈린 시립도서관(Tallinn City Library) 내에 문을 연 청소년 도서관의 일부로서 어린이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역할만을 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1년, 국립도서관에 귀속된 이후부터는 에스토니아 아동문학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이후, 구소련 시절의 어린이∙청소년 도서관, 독립 이후의 에스토니아 아동문학 정보센터라는 이름을 거쳐 지난 2007년,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후 오늘날에 이르렀다. 현재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가 담당하는 역할은 크게 여섯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의 아동문학과 아동 관련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아카이브 도서관, 아동문학을 독자들과 연결하는 어린이∙청소년 도서관, 아동문학분야 자료 수집과 분석, 아동문학 서지센터, 대규모 문학 프로젝트를 비롯한 이벤트 운영, 그리고 아동문학에 관심 있는 사서, 교사, 학생 등 대중을 위한 교육이 바로 그것이다.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 도서관
센터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우측으로는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소에 걸맞게 서가에 꽂힌 책 대부분은 아동, 청소년 도서와 관련서적들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내뿜는 공간과 어우러진 알록달록 예쁜 그림책들이라니! 여기에 앉아 책을 읽으면 참 좋겠다 싶은 장소에는 어김없이 의자가 한두 개씩 놓여 있었다. 이용자들을 배려한 마음 씀씀이가 이곳과 참 잘 어울렸다. 도서관은 여러 개의 방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옆방에서는 열댓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책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2층으로 우르르 몰려가 또 다른 방에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종이를 자르느라 야단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작은 얼굴들은 반짝였고 그림을 그리는 손길은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아이들의 마음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 온전히 꽉 차 있고 온전히 행복할 테지. 어느덧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잡생각들을 물리치고 무엇 하나에 완벽하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게 된 나는, 그 어린 마음들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아이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 김에 나는 나머지 공간들도 살펴보았다. 작은 전시관을 겸하는 공간도 있었는데 에스토니아를 대표한다는 아동문학작품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는 그곳에서는 작가들의 육필 원고과 초판본과 같은 귀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몸피에 걸맞게 제작된 것인지 보는 것만으로도 앙증맞은 사이즈의 의자에는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알고 보니 에스토니아의 일러스트레이터분들이 작업한 그림을 의자에 입혀 놓은 것이란다.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 도서관
글자를 몰라도, 그림만으로도 빠져들게 만드는 그림책의 세계
혼자서 2층을 둘러본 후 1층으로 다시 내려와 보니 아이는 어느새 도서관 한 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엄마, 아빠도 모르는 에스토니아어를 우리 아이가 하는 줄 알았네. 하지만 에스토니아어 해독력이 없지 우리가 그림 이해력이 딸리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사실, 에스토니아어를 몰라도 좋다. 그림책의 장점이 무언가. 그림만으로 글에 담긴 것 이상의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것 아닐까. 마음에 드는 책을 각자 두 세 권씩 뽑아 들고 널찍한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나와 아이는 에스토니아 출신 작가들이 자기네 나라 언어로 그려낸 이야기에 한국어로 살을 붙여가며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우리 둘의 모습을 본 나이 지긋한 직원 한 분이 다가와 이 나라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라면서 그림책을 몇 권 더 갖다 주시기도 했다.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했는데 그들의 언어로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조차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해 영어로 땡큐라고만 인사를 건넨 것이 지금 생각해도 죄송하고 아쉽다. 그날 우리에게 소개해 주신 책들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왜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시던 그분의 소녀 같은 표정이 떠오른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이는 늙지 않는가 보다.
아동문학의 힘
나는 아직도 가끔, 비에 젖은 탈린의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 옆, 수많은 이들의 엉덩이를 거치며 쿠션이 포근하게 내려앉은 의자를 떠올린다. 의자 옆으로는 예쁜 그림책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서가가 서 있고 나는 그것들의 호위를 받은 채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긴다. 그리곤 곧이어,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쓰인 이야기의 세상에 푹 빠져버린 내 아이의 곁에 앉아 함께 어여쁜 그림책들을 넘겨보기도 한다. 에스토니아 아동문학센터에서 처음 만났던 에드가 발터와 귀여운 포쿠들도 덩달아 내 마음을 노크한다.
때로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커다란 세계가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작은 상상력에서 탄생해 이제는 수많은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이야기들. 그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의 마음에 커다란 물결을 일으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