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후현(岐阜県, Gifu prefecture)에 속한 히다(飛騨, Hida), 혹은 히다후루카와(飛騨古川, Hida-Furukawa)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일본 알프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 자리하고 있다. 작은 마을일 뿐이지만 애니메이션의 흔적을 좇아 몰려드는 '성지순례객'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인 <너의 이름은(君の名は, Your Name)>에서 여자 주인공인 이츠하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인 이토모리의 배경이 바로 이곳, 히다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그 성지순례, 우리 가족도 다녀왔다.
비
지도를 살펴보니 마을 중심가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기는 힘들 것 같아 보이길래 우리는 기차역 근처에 주차를 하고 걷기로 했다. 그런데 내내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던 하늘이 우리가 주차장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겨 올 생각은 못했는데 이를 어쩌나.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우산을 파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남편 둘 뿐이었더라면 대충 비를 맞거나 피해 가면서라도 돌아다녔을 테지만 아이까지 비에 젖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은 나 몰라라 하며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히다를 둘러보고 난 후 숙소를 잡아 놓은 다른 도시로 이동을 해야 했기에 비가 그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산을 살 곳을 찾지 못하면 빌릴 곳이라도 반드시 찾겠다는 결심을 하자마자 꽤나 번듯해 보이는 건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입구에서 나를 맞아준 직원분은 인사를 건네더니 다짜고짜 우산 좀 빌려달라는 웬 낯선 여자를 보고는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아이와 함께 다녀야 하는데 주변에서 우산 살 곳을 못 찾아 그런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에 세상에, 본인의 우산을 빌려주겠다는 게 아닌가. 퇴근 시간 전까지만 다시 가져와 달라고 덧붙이는 이 앞에서 그것까지 바라고 찾아온 것은 아니니 사양할까 하다가 본인이 빌려주겠다는데 깨끗하게 쓰고 되돌려 드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우산을 냉큼 받아 들고 말았다.
히다의 명물, 세토가와 수로와 잉어떼
이정표 만으로도 길을 찾기 쉬웠던 작은 마을, 히다
히다를 산책합니다
히다는 근처의 다카야마와 더불어 일본 주부 지방의 '작은 교토'라 불리는 곳이다. 마을의 조성이나 정서가 교토와 유사한 곳을 그렇게 부른다 했다. 우리가 거닐던 거리는 400년 전 일본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었다. 많은 것들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히다에서의 시간만은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여행지에 갈 때면 버릇처럼 켜는 지도 앱도 히다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었다. 이정표만 보고도 길을 찾기 부담스럽지 않았고 까짓 길 좀 잃었다 해도 조금만 헤매면 곧 아까 그 장소가 다시 나왔으니까.
때는 여름이어서 동네 곳곳에는 이 계절 특유의 푸르름이 듬뿍 묻어 있었다. 얘네들이 원래 이렇게 예쁜 것이었나 되묻게 만드는 총천연색 과일이며 야채가 정갈하게 진열된 가게 앞에서 뭐라도 하나 사고 싶어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된 식당 앞에는 영화의 포스터는 물론, 자기네 가게가 등장하는 장면을 인쇄해 놓은 그림들이 붙어 있어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밥을 마치 떡처럼 뭉쳐 납작하게 만든 후 그 위에 된장을 기본으로 하는 소스를 발라 완성하는 고헤이 모찌는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기에 우리도 타키 일행에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그것을 먹어보기도 했다.
마을 중심에는 수로(물길)가 있었다. 미야가와의 지류인 세토가와가 이 마을의 수로를 따라 흐르는 것인데 오래전에는 물이 얼마나 깨끗했던지 먹거리를 씻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의 발전에 환경오염이 수반되는 일이 히다에서만 예외일 수는 없었나 보다. 마을이 팽창하면서 점차 오염되어 가는 세토가와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은 주민들이었단다. 그들은 잉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물을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자발적으로 그 강에 잉어 떼를 풀어 키우고 환경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 노력 덕분에 오늘날 이 고장에서는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어린아이만 한 커다란 잉어 떼를 심심치 않게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잉어 먹이를 파는 무인판매대가 있길래 우리도 100엔을 내고 한 봉지를 샀다. 그리고 수로 옆에 걸터앉은 나는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함께 잉어에게 먹이를 던져주었다. 커다란 물고기들은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생긴 조그만 덩어리가 물에 닿자마자 어찌 알고 그렇게 찾아와 날름날름 잘도 받아먹던지. 그 장면은 마치 식성 좋았던 우리 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해 나는 잠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우산을 들고 마을을 산책하다가 조그마한 문화관에도 들어가 보고 따뜻한 느낌의 나무창살이 기억에 남는 가게에서 점심도 먹다 보니 어느덧 비가 그쳐 있었다. 이제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히다 시립 도서관
덕분에 마을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우산을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그냥 돌아 나오기 아쉬워 우리는 도서관 내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사실 이곳도 <너의 이름은>에 등장하는 곳이다. 주인공인 타키와 그의 친구들이 이토모리 마을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방문했던 도서관이 바로 여기. 히다 마을을 찾아온 순례객들이 히다 시립 도서관도 잊지 않고 들르는지 애니메이션을 보고 찾아온 이들을 위해 관련 자료가 모아져 있기도 했다. 시골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도서관 답지 않게 내부는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친 듯 상당히 현대적이고 아름다웠다. 한참 동안 수로 옆에 쭈그려 앉아 잉어를 구경하다 들어온 아이는 내가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물고기들이 등장하는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많이 자랐구나 싶다가도 가끔은 아직 어린애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우리 아이는 세토가와 수로에서 만난 잉어들을 보고는 "나도 잉어 공주가 되고 싶다."라고 말을 했었다. 인어 공주도 아니고 잉어 공주라... 물고기 책에 빠져 있는 아이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잉어의 머리와 사람의 다리를 한 존재가 다시금 떠올라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아이가 속상해할까 봐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는 아이 곁에 앉아 함께 잉어 공주가 나오는 책도 읽고 다른 동물들이 등장하는 책도 살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먹어보고 싶었던 고헤이 모찌도 한 입 앙~
어떤 시간들은 기억 속에서의 모습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어느새 초등학생이 되어버린 아이에게 잉어 공주가 맞니, 아니면 인어 공주가 맞니라고 묻는다면 어쩌면 아이는 엄마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냐는 말로 대답을 대신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히다에서의 우리들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과거를 추억하는 작은 마을을 향해 운전대를 잡았던, 그리고 그토록 먹고 싶다던 고헤이 모찌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신나게 웃던 나의 남편과 제 몸보다 더 커다란 잉어를 구경하느라 세토가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던, 그러더니 결국 자기의 꿈은 잉어 공주라고 말하던 나의 아이를.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던 히다 시립 도서관에서 마무리한 우리의 여행은 그 모습 그대로 나의 기억 속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