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초연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욕망이라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현재의 상태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과정. 때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 자체에서 보람을 얻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목표한 것을 손에 쥘 테니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이 말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나는 보바리 부인의삶을 보며 깨달았다.
개천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만족을 찾아가며 살라는 법은 없다. 어떤 환경을 타고났든 소위, 용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용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여성의 지위나 운신의 폭에 있어 보바리 부인이 살던 19세기 중후반의 프랑스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를 동일선상에 놓고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적 제약만을 핑계로 하기에 보바리 부인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정당하게 획득하기 위한 깊은 고민이나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골 농가의 외동딸로 그 지역에서는 드물게 도회지에서 교육까지 받은 엠마. 그녀는 특출 나지는 않다 해도 어느 정도의 지성과 미모와 재산을 겸비한, 말하자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일구어 나갈 수 있을 만한 기본적인 조건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고향을 떠나 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그녀에게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열정적인 사랑을 꿈꾸게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불행은, 그녀가 이상적인 삶이요 사랑이라 믿었던 일이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면서부터 그녀의 삶을 노크하기 시작한다. 옆 동네 의사, 샤를르 보바리가 청혼을 해 와 그녀는 꿈꿔 오던 삶을 기대하며 그의 손을 잡았지만 애정과 부, 더불어 명예까지 원했던 그녀에게 있어 그저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시골 개업의인 남편과 그의 아내라는 자신의 위치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고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마주 앉아하는 식사, 그녀의 몸짓, 창문 문고리에 걸린 그녀의 밀짚모자의 모습, 그 밖에도 샤를르로서는 한 번도 기쁨의 원천이 되리라고 상상해 보지 못했던 숱한 것들이 이제는 끊임없는 행복을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샤를르 보바리-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었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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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가 특히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식사 시간이었다. 아래층의 좁은 거실 겸 식당은 난로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고 문은 삐걱거렸고 벽에서는 물이 스며 나왔으며 바닥 타일은 축축했다. 생활의 모든 쓴맛을 그녀의 접시에 담아 차려놓은 것 같았다. 삶은 고기에서 나는 김을 대하면 그녀의 영혼의 밑바닥에서 또 다른 구역질 같은 것이 울컥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샤를르는 오래 끌며 먹었다. 그녀는 개암을 몇 개 집어 씹거나 아니면 팔을 고이고 나이프 끝으로 밀랍을 먹인 식탁보에 금을 긋고 있었다.
-엠마 보바리-
누군가가 싫어지면 그 사람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꼴조차 보기 싫어진다 했던가? 엠마는 자신만 바라보며 가족의 행복을 위해 우직하게 일하는 남편을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자신을 둘러싼 현실 너머의 것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때마침(그러면 그렇지!), 한 때의 유희만을 꿈꾸는 겉만 번지르르한 바람둥이 귀족, 로돌프가 나타나 보바리 부인을 유혹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 12. 12. ~ 1880. 5. 8.)의 장편소설, 『마담 보바리』의 등장은 꽤나 떠들썩한 이벤트였음에 분명하다. 1856년, <<르 뷔 드 파리>> 매거진에 연재된 직후, ‘공중도덕 및 종교 모독죄’라는 죄명으로 플로베르와 더불어 그의 글이 게재된 잡지가 기소를 당했으니 말이다. 다행히 재판 결과는 무죄였고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작품은 무명작가에 가까웠던 플로베르를 단번에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해 간통을 저지르고 가산을 탕진한 한 여인이 궁지에 몰린 결과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이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단다. 불륜을 저지르고 파산을 한 후 자살한 시골 의사 부인의 이야기가 당시 신문에 실렸었는데, 플로베르의 지인들이 그에게 그것을 소설로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저자는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인물과 사건을 소설이라는 매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니 당시의 독자 입장에서도 결말을 알고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담 보바리』가 단박에 명성을 얻고 그것을 시공간을 초월해 이어가게 된 데에는 고통 같았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지독했던 플로베르의 글쓰기에 빚진 바가 크다. 소설의 뼈대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무려 4년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디어를 적고 지우고 다시 쓰고 또다시 고치는 고행과도 같은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 것이라고. 엠마(보바리 부인)와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심리와 장면 묘사 등이 어찌나 사실적이고 저자가 고른 단어 하나하나는 얼마나 적절하면서도아름다운지 읽는 내내 소름이 돋을 정도였는데,이러한 독자의 반응은 어쩌면 소설이 쓰인 시점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모르겠다.
이 소설로 인해 탄생한 보바리즘(Bovarysme)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상상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의 상상은 스스로가 실제 모습보다 월등하다는 환상을 의미한다. 환상 속의 제 모습은 너무나도 성공적이고 아름다운데 거울(현실) 속 모습은 그렇지 못하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결국 보바리 부인은 꿈꿔온 귀족 부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로돌프와 불륜 관계에 빠져 들고 남편이 성실하게 번 돈을 마지막 한 톨까지 몰래 털어 쓰는 것을 넘어 빚까지 져가며 사치를 일삼기 시작한다. 결국, 작은 눈송이처럼 시작된 그녀의 거짓 인생은 커지고 커지고 또 커져 결국 거대한 눈 폭풍이 되었고 그녀뿐 아니라 그녀를 가장 사랑했던 남편과 딸의 인생까지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만다.
글의 서두로 돌아가, 누구나 욕망을 하며 살아간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과 모습을 좇아가다 그 안에서 나와 내 주변 인물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기도 했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너무나도 참혹한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나의 욕망이 현실에 기반한 욕망이기를, 그리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는 것이기를 간절히 ‘욕망’하게 된다.
플로베르의 제자인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를 함께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욕망을 지닌 남녀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큰 재미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