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가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는가는 한 인간이 어떤 어른으로 성장하는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게 확실하다고. 내가 읽고 있던 소설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Jr. 1843. 4. 15. ~ 1916. 2. 28.)의 『아메리칸』이었다.
19세기 영문학을 빛낸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헨리 제임스는 미국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렇게 된 데에는 작가의 가정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분명,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도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헨리 제임스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는 18세기 후반,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였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그러했겠지만 빈털터리로 미국 땅에 도착한 그는 상점의 직원으로 시작해 부지런히 돈을 모아 일하던 가게를 인수했고 이후 다양한 사업을 거치며 큰 부를 일구어냈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뉴욕에서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 중 하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쌓아 올린 재산은 후대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며 덕분에 그의 자손들은 평생 돈 걱정 없이 지적인 탐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실제로 헨리 제임스의 아버지(Henry James, Sr.)는 저명한 신학자가 되었고, 어쩌면 헨리 제임스보다 더 유명할지도 모를 형, 윌리엄 제임스(헷갈리지 마시라.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으니)는 19세기 미국을 이끈 사상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여담이지만 미국에 심리학과를 도입한 공로로 ‘심리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체험’이나 ‘의식의 흐름’ 같은 용어들을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이기도 하다.
구구절절 남의 가정사를 들추어 본 이유는 『아메리칸』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그가 겪는 사건들이 저자와 저자의 가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크리스토퍼 뉴만이라는 이름의 미국인으로, 가진 것 없이 태어났으나 타고난 정신력과 재능을 발판 삼아 밤낮없이 일 한 결과 부자가 된 인물이다. 여기까지 보면 저자는 할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크리스토퍼 뉴만이라는 캐릭터를 탄생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뿐이랴. 여생 동안 모아둔 재산을 까먹으며 지내도 될 만큼의 부를 축적한 뉴만이 문득 정신적 목마름을 느끼는 대목에서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그 너머의 것들을 추구하며 살았던, 저자를 비롯한 윌리엄 제임스의 후손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듯하다.
현실 속 인물들과 소설 속 주인공 모두 자신들이 마주한 환경에서 결핍을 느끼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나고 자라고 성공을 맛본 미국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물론 유럽인, 또는 유럽인을 조상으로 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주로 공감대를 얻은 생각이었겠지만, 소설이 쓰인 당시 신대륙으로 구분되던 미국은 이제 막 눈부신 성장을 경험하기 시작한 곳으로 그 앞에는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나 되돌아볼 역사와 문화면에서는 척박한 땅이었다. 매슬로우가 제창한 욕구의 5단계 이론에서처럼, 우리 인간들은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나면 정신적인 욕구를 느끼게 되는 법. 그것은 뉴만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신대륙(미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을 구하기 위해 구대륙(유럽)으로 향한다.
“나는 교양도 없을뿐더러 교육조차 받지 못했어요. 난 역사나 예술이나 외국어나 다른 어떤 학구적 문제에 관해 아는 게 없지만 바보는 아니랍니다. 내가 유럽 여행을 끝낼 쯤에는 유럽에 대해 뭔가 알게 되겠지요. 여기 내 옆구리 아래 뭔가 느껴져요.”
잠시 후 그는 말을 덧붙였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강력한 열망처럼 손을 뻗어 끌어당기고 싶은 욕망이죠.”
우리의 주인공이 처음 머물렀던 곳이자 이야기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는 프랑스 파리다. 그 도시에서 그는 막연히 동경해 오던 유럽의 뿌리 깊은 문화를 마음껏 들이마시기 위해 부지런히 박물관에도 찾아가고 사람들도 만나보지만 기름지지 않은 땅에 나무가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듯,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그가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던 중,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 친구 부부를 우연히 만난 뉴만은 그들을 통해 프랑스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벨가드가(家)와 인연을 맺는다. 마침 그에게는 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성을 만나 결혼이나 해볼까라는 목표가 있던 참이기도 했다. 시의적절하게도 뉴만은 벨가드 가문의 딸인 클레어(싱트레 부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이 여자다라는 생각이 든 순간, 앞 뒤 잴 것도 없이 결혼이라는 목표를 향해 밀고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설이 중간까지도 전개되지 않았는데 결혼이 쉽사리 성사될 리없지. 문제는 콧대 높은 귀족 가문의 몇몇 인물들이 자수성가한 미국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특히 클레어의 엄마인 노(老)벨가드 부인과 오빠인 어베인이 구대륙, 즉, 구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묘사되는데, 이들의 눈에 비친 뉴만은 가문도 지식도 볼품없는, 신대륙에서 온 한낱 돈 많은 장사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결혼식을 앞두고 비참한 방법으로 배신을 당한 주인공. 복수를 꿈꾸던 그는 벨가드 가문의 명성에 제대로 먹칠을 할 어마어마한 비밀을 듣게 된다.
"아, 그렇다면" 뉴만이 말했다. "좋은 팔자로군요. 현세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누리잖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불평을 하죠?"
"불평도 즐거움의 일부가 되니까요. 그런데 당신의 상황에는 나를 초조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어요. 그건 특이하지만 사실이랍니다. (중략) 인생에서 내 위치는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그것에 몰두하기란 쉬운 듯했어요. 하지만 내가 이해하듯, 당신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구축했어요. 일전에 말했듯이, 욕조를 만들어 돈을 번 당신 모습은 어떻든 편안한 자세로 높은 곳에서 만사를 굽어보는 사람처럼 느껴져요. 마치 자신이 상당한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철도를 이용하여 여행하는 사람처럼 세상을 누빈다고나 할까요. 당신은 나로 하여금 뭔가 빠트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요. 그게 뭘까요?"
저자는 평생을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오가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그로부터 얻은 생각을 글로 엮어냈다. 발표한 많은 글들에 그가 평생 품어왔을 화두가 담겨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수밖에. 『아메리칸』이 출간된 것은 1877년의 일이니 소설 속 세계와 오늘날의 세계가 완전히 같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려낸 세계관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뉴먼으로 대표되는 미국이라는 신세계와 벨가드 가문이 대표하는 유럽이라는 구세계의 대비가 흥미로웠던 소설이었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들인 트리스트람 부부와 주인공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젊은 벨가드 백작(발렌틴) 등, 두 세계의 극단에서 조금씩 벗어난, 다시 말해 어느 정도는 중간자적 시선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소설에 생각할 부분을 가미했다는점도 덧붙이고 싶다.
때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머물며 낯선 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과연 누구인지 더 선명하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저자인 헨리 제임스는 태어난 지 일 년이 채 되기도 전부터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다.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다채로운 문화 체험은 그의 인생 전반을 거쳐 말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는 영국으로 귀화한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사후에는 고향인 미국땅으로 다시 돌아가 그곳에 묻혔다니 헨리 제임스의 인생은 진정 아메리칸과 유러피안, 그 중간 어디쯤의 삶이 아니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난 후 저자의 삶이 궁금해져 정보를 더 찾아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그의 묘비. 그곳에 적힌 글귀가 그의 삶과 오버랩된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