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5세기경, 지금의 스리랑카 중부 지방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귀족 집안 여인을 어머니로 둔 이복동생이 있었다. 평민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자신과는 뿌리가 다른 동생을 두려워했다. 더불어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줄지도 모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또한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왕좌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결심은 실천에 옮겨졌고 결국 그는 꿈에도 그리던 왕이 되었지만 두려움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녔다. 누군가가 언제라도 자신을 쉬이 공격할 수 있는 평지에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던 남자는 결국 넓디넓은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오른 바위 위에 왕궁을 짓기로 한다.
지상에서부터의 높이가 200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 게다가 사방이 온통 절벽 형태를 이루고 있는 화강암 꼭대기에 왕궁을 짓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 다른 이들이 만들어 놓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몹시 버거운 그 길을 그 옛날 수많은 백성들이 건물을 올릴 자재를 이고 지고 기어오르다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7년이라는 세월 동안 흘러내린 피, 땀, 눈물의 결과, 드디어 바위산 꼭대기에 두려움에 휩싸인 남자를 위한 왕궁이 완성된다.
바위산 아래에는 궁으로 진입하기 위한 입구가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사자의 입 모양을 한 문이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운 채 포효하듯 입을 벌린 짐승의 형상은 그 누가 보더라도 환영의 의미로는 해석하기 힘든 모양새다. 스스로가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이들을 신뢰할 수 없었던 남자는, 정말로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되는 극소수의 사람만을 데리고 그 문을 통과해 바위산 꼭대기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무려 11년을 살았다는 그는, 이복형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나라를 떠났던 동생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맞서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승에서의 불행하고 불행했던 생을 마치고야 만다.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고통이었을 남자의 이름은 카샤파 1세(කාශ්යප රජ, Kashyapa I). 그리고 그가 머물렀던 바위산 위 왕궁은 '사자의 목구멍'이라는 의미의 시기리야(සීගිරිය, sigiriya)라 이름 지어졌다.
시기리야
몇 년 전 봄, 시기리야에 올랐다. 스리랑카의 봄은 한국의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다. 오르는 길목에 바위에 그려진 여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외로운 왕에게 즐거움이 되어주었다던 그림들과의 조우가 신기했던 것도 잠시, 오르는 길은 대부분 고행과도 같았음을 고백한다.타는듯한 햇살이 그대로 내리 꽂히는 바위산을 올라 우리는 드디어 카샤파 1세의 왕궁이 있었다던 바위 꼭대기에 다다랐다.지붕 하나 없는 그곳에 불화살처럼 달려드는 태양의 공격을 피할 곳은 없었다. 인간이 지닌 질투와 욕심의 처절한 말로를 대변하는듯한 시기리야, 한때는 화려했다던 건물은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왕궁터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으로는 마치 원시림을 연상시키는 깊고 진한 색채의 숲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카샤파 1세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연못이며 정원터가 내려다보였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그러나 나는 궁금해졌다. 오래전 여기에서 살았던 그 남자는 같은 풍경을 홀로 바라보며 과연 행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