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많은 데야?”
돗토리현(鳥取県)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이가 되물었다. 도토리가 많은 데냐니. 미처 떠올려 보지도 못했던 귀여운 질문에 푸하하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답했다. 도토리가 많은 지는 모르겠지만 모래는 참 많은 곳이라고.
일본은 북동쪽에서부터 남서쪽 방향으로 차례대로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라 이름 붙은 커다란 네 개의 섬과 그 주변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라다. 이 중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혼슈(本州)는 세계에서도 일곱 번째로 큰 섬으로 일본 본토의 핵심 지역으로 꼽힌다. 수도인 도쿄를 비롯해 오사카, 교토 등 주요 도시들이 모두 여기에 둥지를 틀고 있는데 지금부터 우리가 찾아갈 돗토리현은 혼슈의 남서쪽, 동해와 맞닿은 지역에 자리 잡은 비교적 한적한 동네다. 해안을 따라서는 평야가 펼쳐져 있고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산지를 비롯한 구릉이 많은 지형으로, 현에서 가장 높은 다이센산(大山)과 동쪽에 위치한 오기노센산(扇ノ山)을 잇는 지역에는 온천까지 발달되어 있어 바다와 산, 그리고 온천욕까지를 모두 즐길 수 있는 여행지라 하겠다.
일본에서 만나는 사막을 연상시키는 풍경
인천에서 시작된 한 시간 반의 비행 끝에 요나고 공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예약해 둔 자동차를 받자마자 곧장 돗토리시의 동해안을 향해 운전대를 잡았다. 목적지는 산인해안국립공원(山陰海岸国立公園) 내 특별보호지구이자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다는 돗토리 사구(鳥取砂丘/ Tottori Sand Dunes)다. 그런데 가만 보자. 사구라면, 혹시, 모래 언덕이라는 의미? 그렇다. 사구(砂丘)란 바람에 의해 이동한 모래가 퇴적되어 생성된 언덕이나 둑 모양의 지형을 뜻한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사막에서는 흔하지만 한국과 가까운 일본의 바닷가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소리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간 것이었다.
바로 이웃 나라에 이런 풍경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본 최대 규모의 해안사구라는 돗토리 사구는 동서로는 16킬로미터, 남북으로는 2.4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닷가에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주로 방문하는 장소는 하마사카사구(浜坂砂丘)라 불리는 곳으로 근처에는 소박하나마 가게 등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입구 옆 주차장에 차를 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내어 근처의 가게에서 장화까지 한 켤레씩 빌려 신고 본격적으로 탐험에 나섰다.
익숙하지 않은 신발에 발을 맡기고 모래 위를 걷는 일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입구에서 멀어질수록 한 두 걸음만 이동하려 해도 모래 속에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 것일까?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다행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우리의 노동을 순식간에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시켜 주는 듯했다. 돗토리 사구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책과 영상으로만 사막을 접했던 여행이가 “엄마, 여기 정말 사막 같다, 그렇지?”라며 제법 뭘 좀 아는 티를 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엄마, 여기 정말 사막 같다, 그렇지?” 사막 좀 아는 남자
그러니까 저 언덕 너머에 바다가 있다는 말이지? 멀리에서 보기엔 바다에 닿는 길이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높이가 최대 90미터에 이른다는 모래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한 지 몇 분, 아니 몇 초 지나지 않아, 나는 괜한 짓을 했네 괜한 짓을 했어라며 스스로를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나름 내 발에 잘 맞는 사이즈로 고른다고 고른 것이었건만 그제야 남의 것이라는 본색을 드러낸 장화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모래에 푹푹 빠져 가끔씩은 벗겨지기까지 하는 것은 기본이요, 내 한 몸뚱이 어찌할 바 모르고 허우적대는 나의 곁에는 나보다 더 버둥거리면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가파른 언덕을 기어 올라 꼭대기에 가 닿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여행이가 있었다. 우리 모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고 싶었던 것인지 경사가 완만한 길을 통해 언덕 꼭대기에 먼저 도착한 남편은 헛발질을 이어가는 우리를 향해 유미야~ 여행아~ 여기 봐바, 여기~하며 찰칵찰칵 요란했는데 그 카메라 당장 집어넣고 이리 와서 우리를 도우지 못할까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그래도 명색이 엄만데, 한 번 시작한 일을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내 아이에게 보여줄 순 없지. 이를 악물고 얼마나 올랐을까? 어느 위치까지 왔나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봤다가 나는 그만 기절할 뻔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절벽은 아니었는데… 나와 여행이가 지나온 길은 마치 낭떠러지처럼 느껴질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던 것이다! 이번에는 괜히 봤네 괜히 봤어라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뒤돌아 내려갈 수도 없게 되었다(그게 더 무서워…). 나는 자칫 잘못하면 당장이라도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아 섬뜩해진 마음을 그러잡고는 앞만 보고 나아갔다. 나와 함께 뒤를 돌아본 여행이는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다가도 장화가 벗겨지면 재미있다고 아래로 미끄러질 것 같으면 그건 더 재미있다고 깔깔대면서 끝끝내 그 길로 모래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포기를 모르는 우리 아이, 장하다, 장해. 그 정신 그대로 간직한다면 너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엄만 다음번엔 좀 쉬운 길로 돌아갈게.
드디어 한 자리에 다시 모인 우리 가족은 비로소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르는 길에 워낙 고생을 해서 그런지 높은 곳에서 만난 바다는 환상 속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넘실대는 짙푸른 물결을 본 여행이는 내친김에 물놀이까지 하고 싶어 했지만 때는 아직 겨울의 기운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3월이었다. 몸은 어른이되 마음만은 아직 어린아이 일 때가 많은 나도 바다를 본 김에 발이라도 살짝 담갔다 빼 볼까라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잠깐의 즐거움 이후에 찾아올 감기가 걱정되어 다음을 기약하고 말았다.
미래를 알 수 없어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돗토리현이 도토리가 많은 곳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래만큼은 차고 넘치는 땅이었다는 것. 그곳을 뒤로하고 떠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사막 위에 세워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이사를 왔다. 돗토리 사구를 바라보며 이토록 거대한 모래 언덕을 과연 언제쯤 다시 올라보려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사방에 모래 언덕이 있는 사막으로 가뿐하게 소풍을 다녀올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니, 사람 일 참 알 수가 없다. 하긴, 요나고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가 험한 모래 언덕을 두 다리로 모자라 두 팔까지 동원해 가며 기다시피 오르게 될 줄 알았던가. 그 길 끝에서 만난 바다가 그토록 아름다울지 상상이라도 했던가.
마냥 신기하기만 하던 모래 사구를 지척에 두고 보낸 3년을 뒤로하고 조만간 우리 가족은 다시 한번 삶의 보금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앞날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매분 매초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해 더 재미있는 것이 인생 아니겠냐고, 돗토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2019년, 일본 돗토리현 돗토리
사구 꼭대기에 오르면 바다가 비로소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남편은 높은 곳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는 걸 좋아한다. 그가 사구 꼭대기에서 내륙을 바라보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