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Jan 05. 2024

프라하의 추억

잊고 싶었던, 이제는 잊고 싶지 않은

유럽 완전정복?

프라하(Praha, Prague)와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1999년인가 2000년 여름의 일이었다. 정확한 년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 일이 되어버렸는데 아무튼 그때 난 친구와 함께 단체 배낭여행그룹에 속해 유럽을 방문한 길이었다. 12박 13일 유럽 완전정복과도 같은, 한니발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침없는 목표 아래 하루가 멀다 하고 숙소를 옮겨가며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말 그대로 찍고 다녔던, 뒤돌아 보니 몹시 피곤했을 여정이었다. 결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이 대륙의 엑기스를 다 훑어볼 기세로 누비고 다녔던 터라 어느 곳 하나 진득하게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그 이후 단체 여행을 피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여름은 나에게 대장정을 함께 했던 이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대부분이 대학생이었던 우리 그룹에 30대 초중반쯤 나이의 커플이 있었다. 미술을 전공했다던 언니와 오빠는 관련 산업에 종사하다 동시에 일을 그만두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왔다고 했던 것 같다. 부부는 나름 연장자라는 이유로 우리를 참으로 잘 챙겨주었다. 비엔나에 왔으면 이거 한 잔 마셔봐야 하지 않겠냐며 그들이 사줬던 비엔나커피. 노천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셨던 그 향긋한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얼마나 살가운 사람들이었는지, 오랜 세월이 지나 이제는 그 언니와 오빠보다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벨기에 브뤼셀의 그랑플라스에서는 삼성인가 엘지인가, 여하튼 출장을 왔다던 국내 대기업에 다니던 중년의 아저씨들께서 어린 친구들이 멀리 유럽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면서 우리 일행에게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사주시기도 했고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는 버스의 혼잡을 틈 타 일행의 돈을 스리슬쩍 하려던 소매치기를 내가 용기를 내어 잡기도 했었다.


프라하의 (잊고 싶은) 추억

프라하는 그 단체 배낭여행의 수많은 목적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억에 가장 깊이 아로새겨진 도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린 싱싱한 장밋빛을 연상시키는 추억 속에서 혼자만 눅눅한 잿빛으로 남아 있는 곳이었으니까.


프라하에 단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이 도시가 지닌 매력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터. 나와 친구도,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프라하의 오늘에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던 날 일어난 사건 하나로 인해 아름다움이고 뭐고 기억 속에서 깨끗하게 증발되어 버린 게 분명하다.


실수는 우리가 했다. 마지막이고 딱 한 정거장이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하철에 무임승차를 했던 것이다. 죄지은 자에게 당연히 따라붙는 불안을 안고 목적지 역에 도착한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발걸음도 가볍게 출구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눈에 들어온 두 남자. 딱 봐도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을 보자마자 내 몸과 마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뒤돌아 도망갈까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러다 잡히면 더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양심에 찔릴 짓은 벌써 해놓고) 양심의 가책까지 더해져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제는 흥겨움이 싹 가신 발걸음으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출구로 가는 길목을 막고 표 검사를 하던 경찰들의 눈에 우리가 포착되지 않았을 리 없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던 나와 친구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척했고 그렇게 어버버버하다가 결국 사지 않았던 표값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의 벌금을 치르고서야 지하철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왜 이런 시시콜콜한 기억까지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역사를 빠져나온 후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옆에 나란히 선 우리 둘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갖고 있던 바나나를 까먹었다. 뭘 잘했다고 목구멍으로 바나나가 넘어갔는지 모르겠네. 여하튼 내 인생 첫 무임승차였는데 경찰에게 잡힌 충격으로 그것이 내 인생 마지막 무임승차가 된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아마도 좋았을 프라하에 대한 추억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이 내가 프라하를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다시 프라하로

왜 안 좋은 과거는 유독 오랫동안 우리 곁을 맴도는 것일까? 거의 이십 년 만에 다시 한번 프라하를 향해 내달리는 기차에 앉았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임승차를 하지 말아야지라는 것이었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길이었기에 설레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프라하는 나에게 무섭고도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프라하에 다시 가기로 마음먹은 후 준비를 했다. 우리가 방문할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찾아보았고 아이에게 도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냈던 얀 네루다며 카렐 차페크, 마리에 푸이마노바 등의 작가들의 단편이 실린 『체코 단편소설 걸작선』과 『말라스트라나 이야기』를 읽었던 것이 특히나 나의 마음에 기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 같다.

 

프라하의 (이제는 잊고 싶지 않은) 추억

우리 가족이 선택한 숙소는 프라하 관광의 중심지라 할만한 구시가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비교적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큼직한 침실 두 개와 거실 하나, 부엌 하나, 여기에 욕조가 딸린 욕실까지 갖춘 고풍스러운 아파트형 호텔이었다. 유럽 많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던 2차 세계대전 당시, 빠르게 항복했던 프라하는 무자비한 폭격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때 폐허가 될 뻔한 순간을 가까스로 피한 건물 중에 1338년에 건축된 프라하 구시청사도 있었다. 특히 이 건물에 설치된 천문시계는 1410년에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같은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이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한 채로 작동하고 있는 이 시계는 체코 고딕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집약체라 했다. 우리의 숙소 창문을 열면 이 천문시계가 훤히 보였다.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위쪽에 달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작은 목각인형들이 나와 퍼포먼스를 펼쳤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종을 치면서 쇼가 시작되고 이어 열 두 사제를 상징하는 목각인형들의 행진이 이어지곤 했다. 오래전 이 시계를 만들었던 기술자는 이후 유럽 다른 나라들로부터 같은 시계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한다. 다른 곳에도 같은 시계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던 프라하 시의회가 불에 달군 인두로 그의 눈을 지져 멀게 했다는 끔찍한 전설까지는 아이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몇 번이고 천문시계의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동안 자신이 세상에 남긴 최고의 작품 때문에 눈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시계공이며 욕심 때문에 잔인해졌을 프라하 시의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숙소 창문을 열면 바로 구시청사의 천문시계가 훤히 보였다

 

숙소 바로 앞이 구시청사 앞 광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밤늦은 시간까지 그곳을 만끽할 수 있었다. 광장 바닥에 앉아 남편과 나는 숙소 근처 작은 슈퍼에서 산 맥주를 홀짝이고 아이는 스스로 고른 과자와 음료수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해는 이미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사방은 마치 한낮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관광지를 떠나 오면 내가 도대체 이걸 왜 샀을까라며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허술한 기념품 등속을 파는 이들, 그리고 화려한 밤의 도시를 구경하며 신이 날대로 났는지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의 밤도 깊어만 갔다. 아이는 결국 그 광장에서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나는 게 아쉬웠던 우리 부부는 무릎 위 아이를 눕히고 오래오래 시간을 끌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같은 장소라도 누구와 함께 방문하는지에 따라 완연히 다른 곳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오래 전의 기억 때문에 다시 찾기 두려운 도시였지만 남편과 아이와 함께 찾아간 이래, 프라하는 꼭 다시 한번 방문하고픈 곳이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2019년에 이 도시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살펴보았다. 사진 속에서는 지금보다 어린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1999년인가 2000년에 나와 함께 프라하를 여행했던 이들은 지금쯤 다들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그 여름 우리가 프라하의 어드메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이 문득 그리워진다. 오래전 여름을 함께 지낸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각자의 자리에서 여행을 이어가며 인생을 즐기고 있기를 바란다.


2019, 체코 프라하


프라하 여행에서 찍은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나의 남편과 아이가 함께 하는 풍경
이전 05화 행복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