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체코 프라하에 다녀왔던 것이 1999년의 일인지 아니면 2000년의 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적었다(프라하의 추억). 옛 여권을 뒤져보면, 혹은 예전의 사진 폴더를 열어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은 까닭에 아직도 언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프라하에서 흑역사를 썼던 나와 친구는 1999년 여름과 2000년 여름을 내리 함께 했고 우리의 또 다른 여행지는 중국이었다.
진정 먼 나라 이웃 나라, 중국으로
그즈음 갓 스무 살을 넘겼던 우리 둘은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의 청도로 들어가 한 달 동안 기차로 내륙지방을 둘러본 후 천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되돌아오는 일정으로 여행을 했다. 당시의 중국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만리장성이며 북경의 자금성, 항주의 서호 같은, 사진과 이야기로만 접하던 곳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지만 몇몇 장소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말이지 굉장한 경험을 안겨 주었다. 예를 들면, 공중화장실의 적나라한 광경은 우리를 기절초풍하게 만들 정도였는데, 대도시 큰 기차역 재래식 화장실의 배설물 통로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가장 하수구 쪽에서 일을 보다 보면 다른 칸에 앉은 사람들이 무얼 먹고 싸냈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다 확인할 수 있게 되는 식으로… 아… 그만하자. 대학생이 될 때까지 키워주셨는데 내 여행 가자고 부모님께 또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아 직접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그래서 비행기 대신 배를, 고급 숙소 대신 험한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허름한 숙소를 택했고 기차마저도 딱딱한 의자의 딱딱한 등받이가 뒤쪽으로 조금도 눕혀지지 않는 가장 저렴한 칸을 타고 돌아다녔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두고두고 기억날만한 순간들이 쏠쏠하게 탄생한 여행이었다.
중국 미식 여행
흔히 세계 3대 요리로 중국, 튀르키예, 프랑스요리를 꼽는다. 예산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중국엘 간 김에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친구와 더불어 처음으로 중국을 찾았을 때뿐만이 아니라 이후 같은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마찬가지였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했던 북경(北京, Beijing) 여행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맛있는 게 도처에 널린 나라라고는 하지만 아무 거나 주문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심사숙고는 필수였다. 사진을 보고 설명을 읽으며 상상한 맛과 전혀 다른 맛인 요리도 부지기수였다. 도대체 어디 가서 무얼 사 먹어야 기분 좋게 배 두드리며 식당을 나설 수 있을까. 우리 부부는 몇 번의 실망 끝에 이미 이 나라에서 먹어봤기에 맛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요리를 먹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북경식 오리고기, 베이징 덕(베이징 카오야) 전문점이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었다. 목적지는 자금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식당은 메뉴판의 생김새부터가 대륙의 호방함을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찌나 크고 두껍던지 오래 들고 있으면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쓸데없이 크기만 크고 두꺼운 게 아니라 각각의 요리 사진에 중국어와 영어로 된 설명이 자세히 곁들여져있던 덕분에 중국어를 몰라도 무얼 먹을지 선택하는 것이 쉬워 참으로 다행이었다.
대륙의 메뉴판. 이 전으로도 후로도 이렇게 두꺼운 메뉴판은 보지 못했다
먹고 싶었던 것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이 주문 완료. 오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애피타이저로는 해삼과 왕새우가 주재료로 들어간 수프가 등장했는데 한 입 집어 먹고 나니 ‘아, 제대로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그걸 우리가 몹시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나 보다. 서빙하시는 분이 슬쩍 밥 한 공기를 테이블에 올려놓으시더니 스프랑 섞는 제스처를 취하시길래 그대로 해보았다. 와우, 꿀맛! 다음에 도착한 것은 귤. 생긴 건 평범했지만 이번에는 담음새가 천상의 그것이다. 접시 밑에 드라이아이스를 깔았는지 어쨌는지 마치 호숫가에서 산신령 등장하듯 구름을 뭉게뭉게 내뿜으며 귤님이 어찌나 멋지게 등장하시던지, 난 그만 일어서서 두 손으로 접시를 받을뻔했다.
부릉부릉. 애피타이저로 슬슬 시동을 걸고 있는 동안 드디어 베이징 덕을 먹기 위한 세팅이 시작되었다. 오리 고기와 함께 먹을 각종 소스와 쌈이 테이블 위에 깔리고 이어 셰프로서의 자존심을 머리 위에 쌓은 듯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은 모자를 쓴 셰프 두 분이 손에는 번쩍이는 칼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베이징 덕을 부위별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덕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몇 가지 방법
하나. 바오빙이라 불리는 밀전병에 간 마늘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오리 고기 두 어 점과 좋아하는 야채를 넣어 쌈처럼 싸 먹는다. 꿀맛.
둘. 바삭하게 익힌 공갈빵 안쪽에 마찬가지 방법으로 간 마늘을 얇게 깔고 오리 고기와 야채를 넣어 먹는다. 꿀맛.
셋. 바삭하게 구워진 오리 껍질을 설탕에 푹 찍어 먹는다. 이 또한 꿀맛.베이징 덕 완전 정복, 어렵지 않아요!
나와 남편은 애초부터 그곳에 오리 고기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접시를 싹싹 비우고 입에서 사르르 녹는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주문해 먹은 후에야 식당문을 나섰다.
하늘 높이 솟은 모자를 쓰고 나타난 셰프는 우리 테이블 옆에서 오리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주었다
궁금해서 굳이 먹어보았다. 그런데 얘네... 진짜 해마였을까?
그 전날의 일이었던가. 진위가 의심되기는 했지만 어떤 맛인지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우리 둘은 북경의 길거리에서 파는 해마 꼬치를 사서 먹었더랬다. 생긴 건 정말 해마랑 똑같이 생겼지만 한 입 베어 무니 특별한 맛도 나지 않고 질기기는 또 어찌나 질긴지 이게 정말 해마일까? 혹시 해마 모양 플라스틱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요상한 음식이었다. 자칫하면 그 기억을 안고 귀국을 할뻔했는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비록 베이징 덕이랑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마늘을 어찌나 많이 먹었던지 다음날까지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입 안에 마늘향이 감돌기는 했지만 괜찮다. 다음 날이 아니라 그 다음다음 날까지도 마늘의 기운이 우릴 떠나지 않는다 해도 다시 북경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도 마늘 듬뿍 얹어 베이징 덕을 먹어줄 테다. 이번에는 한 마리 말고 두 마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