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호호 불어야 하는 겨울이 되면 다시 찾아가고 싶어지는 곳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자리한 미황사(美黃寺)다. 달마산(達磨山) 중턱에 자리한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 최남단에 있는 사찰로, 나는 오랜 기간 이곳의 주지스님이셨던 금강스님이 쓰신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이라는 책을 읽고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금강스님은 잊혀가고 있던 미황사를 사람들 곁으로 불러낸 주인공이셨단다.
창건신화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돌로 만든 배 한 척이 달마산 아래 포구에 도착한다. 의조화상과 마을 사람들이 달려 나가 그 안을 들여다보니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고 배에는 불교 경전을 비롯하여 불상, 불화, 검은 돌 등속이 실려있었다. 바로 그때, 검은 돌이 갈라지고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같은 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이 나와 자신은 우전국(지금의 인도)의 왕인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찾던 중에 달마산 꼭대기에 1만불이 나타난 것을 보고 여기가 바로 부처님을 모실 자리라는 생각에 배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검은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부처님을 모시라 했다. 의조화상은 금인이 시킨 대로 소를 몰고 달마산에 올랐고 그 신성한 동물이 처음으로 누워 긴 울음소리를 낸 곳에 통도사(通敎寺)를 짓고 소가 마지막으로 머문 자리에 미황사를 짓기로 한다. 소의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는 의미에서 미(美) 자를 따고, 황홀했던 금인의 색깔에서 황(黃) 자를 딴 것이었다.
겨울 여행
우리 가족이 미황사에 도착한 것은 어느 겨울의 일이었다. 아직 어렸던 아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낮잠을 자곤 했었는데 마침 그즈음이 잠을 잘 시간이어서 우리 부부는 미황사 초입 주차장에 차를 두고 잠든 꼬마를 유모차에 태워 목적지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황사 쪽에서 걸어 내려오시던 아주머니께 길이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더랬다. 그러자 그분은 유모차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시더니 주차장에서 미황사까지는 계단이 너무 많아 유모차로는 절대, 절대 못 올라간다 하시는 것이었다. 유모차로 가는 게 아이를 안고 가는 것보다 더 힘들 게 분명하다며 주차장 오른편에 있는 길을 가리키더니 “저쪽 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조그만 주차장이 있는데 그걸 이용하세요.”란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위쪽으로 이동해 차를 대려고 하는데 그곳에는 미황사 신자들만 주차할 수 있는 곳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뿔싸. 우리는 미황사 신자는커녕 불교 신자도 아닌걸. 너무 눈치가 보여 다시 아래로 내려갈까 고민도 했지만 이미 올라왔고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를 자신도 없는 데다 마침 방문객도 별로 없어 보이길래 염치 불구하고 그냥 그 자리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랬던 것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늘 떳떳하게 살기란 이렇게나 어렵다.
미황사
여하튼 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를 한 우리 셋은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를 안고 그대로 구경을 이어갈까 하다가 잠이 든 탓에 축 늘어진 십육 킬로그램짜리를 안고 사찰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고 아이를 잠시나마 누워서 자게 해주고도 싶어서 미황사 내부에 자리한 다원 겸 기념품가게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남쪽이라고는 해도 아직 겨울은 겨울인지라 밖은 아직도 추운 기운이 완연했다. 그런 곳에 있다가 난롯불 속 장작이 타닥타닥 정다운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실내로 들어가니 잠이 솔솔 올 정도로 몸도 마음도 따스해졌다. 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따끈한 차 두 잔과 연근과 마로 빚어냈다는 연꿀빵을 주문했다. 마치 연화문처럼 생긴 연꿀빵은 안에 통팥까지 가득 들어 있었는데 남편은 맛있다, 맛있다 연발 하며 그 자리에서 한 박스를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미황사
아이는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어 나올 기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번갈아가며 미황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집 꼬마는 한 번 낮잠을 자기 시작하면 적어도 세 시간은 푹 잘 테니 급할 것도 없지. 먼저 길을 나선 나는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뒤로는 병풍처럼 달마산을 두른 미황사는 책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절을 방문할 때마다 단청의 매력이 사로잡히고 마는데, 이 산속 사찰에서 만난 그것은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달마산이라는 배경 덕에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의 사찰은 산속, 풍경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곳들이 참 많다. 계절마다 풍경은 변하기에 같은 장소라도 어느 시기에 방문하는지에 따라 그 맛이 다른 이유다. 미황사는, 부석사나 석굴암처럼 사찰에서 내려 보이는 광경이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장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둘에 비하면 단조로워 보이는 주변의 풍경조차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게 할 만큼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이 답답한 이들이 왜 산사를 찾아드는지 이해가 될 것만 같은 느낌.
미황사 경내에서 보이는 풍경
얼마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다리가 조금 아파왔고 내 볼을 두드리는 바람은 겨울 기운이 완연했지만 나는 경내를 조금 더 돌아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모아 놓았을 귀여운 동자승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니 아직도 쌔끈 쌔근 잠을 자고 있는 나의 아이가 떠올라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점점 더 속도를 더해 사람 사는 세상 가까이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겨울 햇살아래 버섯이 말라가는 그곳, 내 사랑하는 두 남자가 기다리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