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Feb 02. 2024

아주 작고 작은 우연의 연속

어쩌면 인생은

일본의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가 쓴 『요노스케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인 요노스케와 그를 둘러싼 이들의 삶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별 것 아닌 일상 속 사건들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은 원래,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작디작은 일들을 계기로 빚어져 어떠한 모양으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계기는 많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계기’라는 것은 굉장히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곤 한다. 나와 남편이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향해 길을 나서게 되었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곳을 목적지로 고려하게 된 것은 남편과 타오르미나 살바토레 아저씨와의 추억 때문이었다(살바토레 아저씨와의 추억).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정말로 시칠리아행 비행기에 오르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한 권의 책,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의 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이었다.



푸른 것을 넘어 새파란 하늘과 그 비현실적인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를 드리운 분홍빛깔 꽃나무가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언뜻 봐도 오랜 역사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이름 모를 도시의 풍경. 도대체 저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책의 제목이 『론리플래닛 시칠리아』이니 분명 시칠리아의 어딘가 일 텐데 도대체 그 섬의 어드메쯤이려나? 나와 남편은 그곳이 어디인지 몹시도 궁금해졌고 사진 속 그 장소에 직접 가 보고 싶어졌으며 그러다가 정말로 어느 해 가을, 시칠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 것이었다.


인천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나폴리로, 그리고는 나폴리항에서 출발하는 밤배를 타고 시칠리아 팔레르모로 이동한 우리는 작은 자동차 한 대를 빌려 이 섬을 돌아보기로 했다. 어두운 밤 인적 드문 시칠리아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온 우주에 우리와 우리가 탄 꼬마 자동차 한 대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는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헤드라이트 빛에 의지해 미래로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다가 저 멀리 언덕 위에 불빛 반짝이는 도시라도 나타날라치면 마치 그것이 천공의 섬 라퓨타처럼 비현실적으로 반갑고 아름답고, 동시에 쓸쓸하게도 느껴지는 것이었다.


라구사


그렇게 며칠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거짓말처럼, 우리를 이 지중해의 섬으로 이끈 풍경이 나타났다. 동네의 이름은 라구사(Ragusa)였다. 이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서울에서부터 그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구나. 와, 우리 정말 해냈구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이 찰랑찰랑 차올랐다. 협곡 위로 솟아오른 구릉지대에 자리한 이 도시는 구 라구사(Old Ragusa)와 신 라구사(New Ragusa)로 나뉜다 했다. 각각 고지대와 저지대에 자리한 두 지역은 마치 두 개의 다른 도시처럼도 보이는데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신 라구사로, 우리 둘을 시칠리아로 이끈 책의 표지사진 속 바로 그 장소였다.


계획대로 우리는 신 라구사에 숙소를 정하고 이 작고 낡고 멋진 도시를 마음껏 탐험해 보기로 했다. 17세기말, 지진으로 인해 구 라구사 지역이 피해를 입게 된 후 건설된 곳이 신 라구사였다. 도시보다는 마을에 가까운 그 동네에는 작은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일방통행로가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오래된 이탈리아 도시들의 도로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일부러 작은 자동차를 빌렸건만 사이드 미러까지 접고 운전을 해야만 하는 좁디좁은 길들이 종종 나타났다. 그곳에 도착하던 날, 호텔에까지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젊은 영국인 커플을 만났었다. 길을 묻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려다 포기한 그들은 가는 길이 너무 복잡해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니 차를 함께 타고 가면서 안내해 줘도 되겠냐 물었더랬다. 그래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좁기도 좁은 데다 구불구불하기까지 한 자갈길을 사이드 미러를 접은 채 차근차근 운전해 나아가는 남편을 보고 그들도 나도 감탄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예약해 둔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칠리아의 햇살은 하루 종일 인심이 후했다. 우리를 여기로 이끈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호텔에 짐을 푼 우리 부부는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곤 오래된 도시와 갓 태어난 그날의 햇살을 함께 들이마셨다. 따스한 햇살 아래 대화를 나누며 음미했던 커피도, 커피를 마시다 식탁 테이블을 피아노 삼아 좋아하는 연주를 하던 남편의 모습도 나의 기억 속에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 기억 속 라구사의 추억들


오랜만에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의 한 갈래를 따라가다 보니 이탈리아 시칠리아 하고도 라구사에까지 다녀왔다. 그래, 정말로 인생이란 아주 작고 작은 우연의 연속.


2012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라구사


라구사의 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라구사의 성당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