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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Feb 16. 2024

왕버들보다 사과, 산책길보다 국수

주산지에서 만난 아침

몽환적(夢幻的). 마치 꿈이나 환상과도 같은 것.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소들이 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경북 청송의 주산지다.

 

몽환적인 주산지의 풍경은 물안개 자욱한 새벽녘에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번 나들이는 어린 여행이와 함께 할 예정이기에 꼭두새벽부터 길을 헤매는 고생을 자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두르되 너무 일찍부터 움직이지는 말자, 아침 식사 정도만 거르고 숙소를 나서자 결정했다. 유명한 관광지이니 근처에 허기를 채워줄 만한 가게 하나쯤은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떠난 길이었다.

 

숙소부터 목적지까지 자동차로 십오 분 남짓이나 걸렸을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차창으로 스며드는 신선한 아침 공기 덕분이었는지 앞 좌석에 앉은 우리 부부도, 뒷좌석 카시트에 자리 잡은 여행이도 잠에서 완전히 깬 상태로 주산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엄마, 여기 뭐 먹을 거 파는 데 없어?”라고. 오죽 배가 고프면 첫 질문이 엄마, 여기 어디야가 아니라 먹을 것 파는 데 없어였을까! 애를 먹이고는 데리고 돌아다녀야지 싶은 마음에 주차장 옆 유일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가게의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 주변을 둘러보니 좌판에 사과를 쌓아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과라니, 과연 청송이다. 그나저나 사과는 여행이가 즐겨 먹는 음식은 아니지만 그거라도 먹여야지 별 수 있나. 우리는 다시금 주차장을 가로질러 그네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공짜 청송 사과

아직 해가 중천에 뜬 시간도 아니건만 멋들어지게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타난 여행이에게 할머니 한 분이 거기 안녕 쓴 청년, 이리 와서 청송 사과 하나 먹어보라 하신다. 예쁘다, 아이고 잘 먹는다, 씩씩하다. 칭찬으로 샤워를 해가며 사과 반 알을 그 자리에서 뚝딱 먹어치우는 꼬마를 본 할머니들은 “안 사도 된다. 이거 가져가라.”며 아이의 손에 붉게 반짝이는 사과 몇 알과 사과즙 두 포를 쥐어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사과 한 봉지 사드릴까 하다가 그 무거운 걸 들고 한참을 걸어 다닐 일이 엄두가 나질 않아 일단 감사 인사만 드리고는 주산지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 사도 된다. 이거 가져가라." 청송 사과 할머니들의 인심


세 그릇 같은 잔치국수 한 그릇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문을 연 매점 하나가 있었다.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냉큼 문을 열고 들어가 여행이를 위한 잔치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지불한 것은 분명 일반 잔치국수 한 그릇 값이었는데 잠시 후 테이블에 도착한 것은 시골 마당에 놓아기르는 큰 개의 밥그릇 사이즈만큼 커다란 양푼과 그 안에 넘치지 않고 담겨있는 게 기특할 정도로 가득 찬 특특대 사이즈의 국수였다. 그것도 각종 야채에 송화버섯까지 추가된 푸짐한 고명이 얹힌. 그 한 그릇 만으로도 이미 놀랄 지경인데 바로 옆에 일반적인 사이즈의 잔치국수가 한 그릇 더 있었다. 우리가 주문한 게 아닌데 혹시 잘못 주신 것은 아닌지 여쭈니 주인장 아주머니왈, 양푼에 담긴 건 엄마, 아빠 둘이 나눠 먹고 아이 먹으라고 양념을 안 맵게 해서 하나 더 만들었으니 (우리 기준에는 절대 작지 않았던) 작은 그릇에 담긴 건 아이 먹이란다. 무언가를 더 사게 만들려는 상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반쯤은 상술이었겠지. 그러나 그분들의 넉넉한 인심 덕분에 우리 가족은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람 마음 행복하게 만드는 이런 상술이라면 언제든지 다시 당하고 싶다.


분명 잔치국수 한 그릇 값을 냈는데 시골 마당에 놓아기르는 큰 개의 밥그릇 사이즈만큼 커다란 양푼에 가득 담긴 국수가 도착했다


주산지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아침식사였다. 잔치국수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우리 셋은 매점 주인장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리고 돌아 나왔다. 매점에서부터 주산지에까지 이르는 길은 다 큰 어른들의 걸음으로는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어린아이와 함께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찌나 많은 복병이 곳곳에 숨어 있는지! 한 걸음 걷고 나면 어디선가 애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 어서 이리 와 나 좀 살펴봐 달라 하고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릴 수 없는 우리 집 꼬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그것이 느릿느릿 지나가는 동안 곤충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겨우겨우 애벌레를 떠나보내고 이제 좀 앞으로 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기어올라가고 싶은 욕구를 동하게 만드는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기어올라가는 수밖에. 이런 이유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후에야 우리는 주산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주산지 가는 길. 복병이 많았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던 주산지 가는 길


주산지는 1720년에 착공해 그 이듬해에 완공된 저수지다. 규모로 본다면 아주 큰 저수지는 아니지만 완공 이래 오늘에 이르는 300년 넘는 세월 동안 아무리 심한 가뭄 중이라도 단 한 번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한다. 현재는 주왕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데 일부 구역은 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여행자는 지정된 탐방로를 따라서만 둘러볼 수 있다길래 우리 셋도 그 길을 따라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이곳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故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아닐까. 영화의 촬영지이기도 한 주산지의 풍경은 참으로 신비하다. 물속에 반쯤 잠겨 있는 왕버들이 매년 봄이면 연둣빛 잎을 틔우고 여름을 지나며 초록으로 깊어지다가 가을이 되면 울긋불긋한 낙엽으로 옷을 갈아입고 이어 겨울을 맞이한다. 물속에 뿌리부터 밑동까지가 완전히 잠긴 나무가 어떻게 썩지도 않고 이 저수지를 몇 백 년 동안이나 지키고 있는지, 다시 보아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주산지의 봄
어른끼리 하는 여행에 비하면 속도는 느리지만 그 덕분에 대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만끽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선사하는 기쁨 아닐까


왕버들보다 사과, 산책길보다 국수

주산지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같은 곳을 찾아왔을 땐 왕버들만 쳐다보다 온 것 같은데 세상만사가 다 궁금하고 신기한 나의 아이와 함께 하니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까지 눈에 들어왔다. 어른끼리 하는 여행에 비하면 속도는 느리지만 그 덕분에 대상의 세세한 부분까지 만끽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선사하는 기쁨 아닐까.

 

주산지에서 아침을 보내고 돌아 나오는 길, 우리 가족은 잔치국수를 먹었던 매점에 들러 땅콩기름 한 병을 사고 여행이에게 청송 사과의 맛을 알게 해 주신 할머니를 다시 찾아가 사과즙 한 박스를 샀다. 가볍게 떠났다 두 손 무겁게 돌아온 여행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2018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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