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동남아 해변휴양지가 그러하듯 코타키나발루도 아름다운 바다 주변으로 생겨난 작은 동네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래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라는 보르네오(Borneo) 북서부에 자리 잡은 이 도시가 말레이시아 사바주(州)의 주도이자 무려 60만 명가량이 모여 사는 제법 번화한 곳이라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단 몇 번의 경험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아뿔싸, 또 실수를 하고 말았네!
지도를 살펴보니 근처에 키나발루라는 산이 있었다. 그것과 도시의 이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산의 이름을 따 도시의 이름을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라 지은 것이란다. ‘코타(kota)’는 말레이어로 ‘도시’이니 코타키나발루는 키나발루산 옆의 도시쯤 되는 의미일 테다. 여하튼 그곳에 아흐레나 머무르면서도 지척에 있는 키나발루산에는 정작 가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핑계는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바닷가에서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기쁨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체력적으로 더 힘든 것은 사실이다. 줄인다 줄인다 해도 일단 챙겨가야 하는 짐부터가 배로 느니 몸이 힘들 수밖에. 어쩌면 정신 승리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 더 충만한 경험을 선사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웃음의 언덕을 넘고 울음의 강을 건너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얻기 위해 책을 읽거나 드라마, 영화를 보곤 했지만 아이와 함께 할 때면 매 순간 그 모든 감정을 연이어, 또는 동시에 경험하는 터라 다른 종류의 엔터테인먼트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고조된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편안함이 찾아오고 때로는 그것이 푹 잘 쉬고 난 이후 내 마음을 두드리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느낀 적도 많았다.
우리 가족이 코타키나발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여행이는 인생 살이 겨우 31개월 차 아가였다. 게다가 연세가 있으신 시부모님과도 함께였기에 그 상황에서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가는 휴식은커녕 오히려 힘만 들 것 같아서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짜지는 않았다. 우리는 걸어서 바닷가며 시장을 둘러볼 수 있는 도심의 호텔에 머물면서 관광을 즐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자리한 해변 리조트에서 조용하고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가야섬
코타키나발루도 섬이지만 그곳에서도 배를 타고 한 번 더 이동해야 하는 가야섬(Gaya Island)의 리조트에서 머무르던 나날은 여러 의미에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섬에 숙소는 몇 개 없는 데다 그마저도 서로 거리가 있어서 우리가 지내던 리조트 안 어디에서도 인파를 피해 한적하게 여유를 즐기는 게 가능했다. 멀리에서 보면 마치 울창한 숲 속 나무 위에 지어진 집처럼 보이는 우리의 숙소에서 슬슬 걸어 내려오면 바닷가에 닿는데 그곳에서는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육지에서부터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오가는 시간을 피한다면 마치 무인도의 해변에서처럼 우리 가족만의 시간을 누릴 수도 있었다. 나는 여행이의 작고 통통한 손을 잡고 파도를 쫓아갔다가 다시금 파도에게 쫓겨오는 놀이를 몇 시간이고 했다. 그게 뭐라고 입을 크게 벌리고 신나게 웃는 아이의 모습에 나도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근처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나 조개를 손에 쥐고 모래밭을 캔버스 삼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지워버릴 그림을 지치지도 않고 그리고 또 그렸고, 붉게 타오르는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을 배경으로 아직 부정확한 발음으로나마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내 아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코타키나발루 가야섬, 우리가 지내던 리조트 안 어디에서도 인파를 피해 한적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근처에서 주워온 나뭇가지나 조개를 손에 쥐고 모래밭을 캔버스 삼아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지워버릴 그림을 지치지도 않고 그리고 또 그렸다
이보다 더 좋기는 힘들다 싶은 나날이 흘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여느 날처럼 우리는 아침을 부지런히 챙겨 먹고 바닷가로 출동했다. 여행이는 제 무릎 깊이의 바닷물에서 참방거리며 놀기 시작했고 나는 그로부터 불과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행이가 “아팠쪄! 아팠쪄!!!”라 외치며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나는 아이를 빠르게 안아 올렸는데 놀랍게도 여행이의 한쪽 발목 둘레에 마치 발찌처럼 보이는 붉은 선이 생겨나 있었다. 리조트에서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눈 이탈리아인 가족이 마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그 소란을 보고는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상처 부위를 살펴보던 그들은 여행이가 해파리에 쏘인 거라고, 자신의 아이들도 전에 같은 경험을 해서 처치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신용카드 같이 딱딱한 물건이 있으면 달라고 하더니 그것으로 해파리에 쏘인 부분을 박박 긁어내 그 못된 바다생물이 남기고 간 독침을 빼주었다. 독침이 박힌 반대방향으로 긁어내야 하고 알코올 같은 것으로 상처 부위를 소독하는 것은 위험하니 대신 바닷물로 다친 부분을 씻어낸 후 아이를 쉬게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덧붙이면서.
아이가 해파리에 쏘였던 날에는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바로 귀국을 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응급처치를 잘했던 덕분인지 상처 부위가 빠르게 가라앉았고 울다가 낮잠에 빠졌던 아이도 일어나자마자 다시 기운차게 잘 논 덕분에 우리는 남은 일정을 예정대로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더랬다. 그랬는데 귀국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상처 부위에 갑자기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난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다시 존재감을 나타내는 상처에 놀란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바지런히 집 근처 피부과부터 흉터 전문 병원까지 찾아다니며 진료를 받았다. 붉은 띠를 두른 어린 여행이의 발목을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걱정을 하고 후회를 했던가. 코타키나발루 가야섬에서 생긴 여행이의 상처는 그로부터 꼬박 일 년이 흐른 후에야 사라졌다.
얼마 전, 친구의 가족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동남아시아의 해변 휴양지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후기를 들려주던 친구는 그곳의 바다에 들어갔다가 온 가족이 해파리에 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맹독을 지닌 놈은 아니었고 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 생물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안내받은 상황이었던 데다 당시 잠깐 따끔하기는 했지만 오래도록 아프지도, 상처가 남지도 않았기에 친구는 큰 걱정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해파리 이야기에 흠칫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코타키나발루에서의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이 접어두고 있던 오지랖을 활짝 펼친 나는, 아문 줄로만 알았던 곳에 혹시라도 물집이 잡히거나 상처가 덧날 경우도 있는데 그때는 이러이러 저러저러하게 대처하라며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해 긴 조언을 늘어놓고 말았다.
여행이는 해파리에 쏘이고 그로 인해 생겨난 상처가 아문 이후까지도 한동안 해파리를 두려워했다. 수족관에 가도 흐물흐물 움직이는 그것들이 담긴 수조 근처엘 가면 두 눈을 꼭 감는 것은 기본이요, 무섭다면서 나에게 안고 지나가 달라 조를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어느덧 두려움을 극복해 낸 것인지 수족관에서는 혼자서도 해파리 수조에 바짝 붙어 서서 관찰을 하고 바다에서는 다시금 첨벙첨벙 물장구를 쳐가며 물속에서의 자유를 만끽하는 아이로 자랐다. 그렇다면 엄마인 나는? 그놈의 생물체가 우리 여행이를 아프게 한 이후엔 그토록 즐겨 먹던 해파리냉채까지도 쳐다보기 싫어졌을 정도도 해파리라면 치가 떨렸다. 그런데 이제 해파리냉채를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무엇보다 코타키나발루 가야섬의 그 바닷가가 친근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걸 보니 그때 그 마음이 조금은 옅어진 게 분명하다. 이제는 다시 해파리에 쏘인대도 대처법을 알고 있으니 다시 한번 떠나볼까? 추운 겨울날의 서울에서 나는 이렇게 다음번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