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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Mar 01. 2024

가장 어두운 계절을 밝히는 가장 밝은 빛

스웨덴 가정집에서 직접 만들어보았습니다

겨울이면 그리워지는 나라

아직 겨울인가 싶다가도 어떤 날은 봄인가라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고 드디어 봄이 왔나 돌아보면 다시금 겨울이 코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만 같은 나날. 지난 몇 년 간 일 년 내내 반팔만 입고 지낼 수 있는 나라에서 살다 내 나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한국의 변덕스러운 겨울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눈이 내렸다. 탐스러운 눈꽃송이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고 그리웠던 설국이 반가웠던 나는 미끄러워졌을 길에서 넘어질 걱정,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로 북적일 대중교통을 이용할 걱정은 잠시 뒤로 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찾아내 발자국을 처음으로 남기는 즐거움에 함빡 빠져보기도 했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나의 흔적을 보듬어 안는 눈을 바라보니 문득 그리워지는 나라가 있었다.


스웨덴의 겨울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스웨덴은 춥고 긴 겨울로 유명한 나라다. 겨울의 스웨덴에서 해를 만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것으로 북부로 올라갈수록 하루 종일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겨울철 낮이 짧아지는 것은 이 나라의 최남단으로 내려와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스웨덴 사람들은 봄의 햇살을 기다리며 긴 긴 겨울을 그저 버텨내는 것일까? 아니다. 자연의 빛이 부족한 춥고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인공의 빛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만 되면 스웨덴에 다시 가고 싶다는 열망에 몸살을 앓는다. 봄의 스웨덴도 여름의 스웨덴도, 그리고 가을의 스웨덴도 좋지만 유독 겨울의 스웨덴이 그리운 이유는 무얼까?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그 북구의 나라에서 보낸 몇 번의 겨울 동안 만났던 따스한 촛불, 그것의 매력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브로묄라에 도착한 시각은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늦은 저녁의 빛으로 어둑어둑했다
스웨덴의 겨울에 만난 귀한  햇살


오래전 겨울, 나는 스웨덴 남부 브로묄라(Bromölla)에 있는 친구의 고향집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브로묄라는 동화, 『닐스의 대모험』 의 배경으로 알려진 스코네(Skåne) 지방에 위치한 인구 8,000명에 못 미치는 작은 마을이다. 친구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은 키 작은 건물들이 오손도손 어깨를 맞댄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웨덴의 여느 지역처럼 인적이 매우 드문 조용한 동네였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이미 늦은 저녁의 빛으로 어둑어둑했다. 스웨덴을 떠나온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 찍었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참 어둡고도 흐린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남부로 내려온 덕분에 해를 볼 수는 있구나라며 나는 참으로 기뻐했더랬다. 브로묄라는 나에게 아주 귀한 한 줌의 햇살과 더불어 겨울마다 생각나는 추억을 선물해 주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그 선물을 꺼내어 볼까 한다.


스웨덴식 전통 초 만들기

“오늘 저녁에 초를 만들 거란다.”


친구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초를 만든다고요? 집에서요?”


겨울의 스웨덴은 오버 조금 보태면 사람 반, 양초 반 세상처럼 느껴질 정도다. 특히 아드벤트(Advent, 크리스마스 4주 전 일요일로 일반적으로 11월 마지막 주부터 12월 첫째 주 사이)부터 12월 말까지는 아드벤츠유스스타케(adventsljusstake)라 불리는 양초 세트가 가정집에서부터 상점, 회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 창가에서 따스한 불을 밝힌다. 과거에는 진짜 양초에 진짜 불을 붙여 창가에 올려두었다지만 안전 등을 이유로 점차 전기로 불을 밝히는 가짜 양초로 대체되는 추세고 만에 하나 진짜 양초가 필요하다면 파는 곳도 많은데 그걸 집에서 직접 만든다니… 동그래진 눈으로 깜짝 놀라는 나에게 친구는 양초를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오랜 전통이라 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제품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양초는 전통적으로 집에서 각자 만들어 쓰던 물건이었다는 거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스칸디나비아의 양초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 자연스러운 하얀색, 그리고 핸드메이드를 특징으로 한다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친구의 어머니는 나에게도 함께 양초를 만들어 보지 않겠냐고 물어보셨다.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물리칠 내가 아니지. 도와드릴 것은 없냐고 여쭈니 아주머니는 나중을 위해 힘을 아껴두라 하시더니 대낮부터 지하 창고와 부엌을 왔다 갔다 하시며 바쁘게 준비를 하셨다. 그런 아주머니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 보았다. 창고 가운데에 온도계가 달린 커다란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끓고 있었다. 파라핀이었다. 처음에는 당장 코를 막고 싶어 질 만큼 충격적이었던 냄새에 슬슬 익숙해진다 싶었을 무렵, 친구의 어머니는 선언하셨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 보자는 말씀도 잊지 않으시면서.


파라핀이 부글부글 끓는 통을 가운데 두고 친구와 친구의 어머니, 나,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 두 분이 한 자리에 모였다. 통 둘레 세 면으로는 나무로 짠 판이 한 쌍씩 놓여 있었고 그들 사이에는 얇은 막대기 수 백 개가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막대 가운데에는 실이 세 줄씩 매어져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좋은 초를 만들기 위해서는 파라핀의 온도가 매우 중요하다며 온도계를 계속해서 체크하셨다. 자, 이제 정말 시작이다!


막대 하나를 잡아 부글부글 끓는 파라핀액 속에 실 부분만 잠시 넣었다 뺀다. 담갔다 뺀 막대는 원래 자리에 걸쳐두고 이번에는 그 옆의 막대를 들고 마찬가지 방법으로 실을 파라핀액에 넣었다 뺀다. 두 번째 막대를 제 자리에 돌려두고 나면 다음엔 그 옆 막대 차례다. 이렇게 동일한 동작을 수 백 번 반복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파라핀액 속에 실을 담그는 시간이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소금 적당량, 고춧가루 적당량처럼 ‘적당한’ 만큼의 시간만 넣었다 빼야 한다는 이야기. 사실 적당한 이라는 단어는 전문가에게나 통하는 게 아닌가. 태어나서 초를 처음으로 만들어 보는 나로서는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괜히 아까운 파라핀만 낭비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죄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전문가 아주머니들을 흉내 내어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 낯설기만 했던 일이어도 손에 익는 게 보였다. 단순 노동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일까?


막대 하나를 잡아 부글부글 끓는 파라핀액 속에 실 부분을 잠시 넣었다 뺀다
실들이 맛있는 음식을 냠냠 먹고 오동통해지는 아이들처럼 동글동글하게 살이 오르는 모양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담갔다 뺐다 담갔다 뺐다, 작업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같은 작업을 반복한 나의 어깨와 팔, 다리, 그 어느 하나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고 독한 파라핀 냄새에 머리도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가늘었던 실들이 맛있는 음식을 냠냠 먹고 오동통해지는 아이들처럼 동글동글하게 살이 오르는 모양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져 왔다. 친구의 어머니와 이웃 아주머니들은 같은 동네에서 살아온 오랜 친구 사이라 했다. 단순해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작업을 하면서도 아주머니들은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하하하 웃음도 나누셨다. 스웨덴어를 하지 못하는 나를 배려하신 것인지 중간중간 영어로 말도 걸어 주시고 내가 궁금해하는 것이 있어 보이면 설명도 해주셨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나 모른다. 전통 방식 그대로 양초를 만드는 일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에 요즘은 상점에서 초를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했다. 하지만 친구의 어머니와 두 분의 아주머니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매년 겨울 함께 양초를 만드실 거라고 하셨다. 만든 것을 내다 팔아 돈을 벌기 위함은 아니라 했다. 오히려 한 자리에 모여 양초를 만들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우정도 나누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로 집안을 따뜻하게 꾸미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 이 긴 작업을 함께 는 것이라 하셨다.


다시 그리워지는 스웨덴의 겨울

한국인 기준으로는 겨울다운 겨울이 없었던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보낸 지난 몇 해 동안에도 나는 겨울만 되면 스톡홀름행 항공권을 검색하곤 했다. 그런데 스웨덴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올 겨울에 놀러 갈까, 아니, 작년엔 못 갔지만 올해는 꼭 한 번 찾아갈게, 몇 번이나 말했놓고는 결국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는 이유로 스웨덴에는 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불빛으로 따스해진 스웨덴의 겨울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나의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는데… 우선순위에서 밀렸든 어쨌든 결국 스웨덴행을 선택하지 않았으니 나는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 한국을 덮은 하얀 눈을 보면서도 나는 스웨덴 생각에 그리움 반, 민망함이 반이다. 그나저나 브로묄라의 아주머니 삼인방은 올 겨울에도 함께 모여 양초를 만드셨을까? 초를 만들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그 과정에서 피어난 오동통하고 뽀얀 양초들을 각자의 집 창가에 올려놓은 덕분에 어둡고 긴 스웨덴의 겨울을 씩씩하게 이겨내셨으려나?


2003년, 스웨덴 스코네 브로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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