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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Feb 29. 2024

[세계의 도서관 기행]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

[기고]월간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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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Gdańsk)라는 지명이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단치히(Danzig)는 어떠한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착각이 아니다. 그단스크로도 단치히로도 알려진 이 땅은 간단히 도려낼 수 없을 정도로 세계사에 깊은 자국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그단스크 혹은 단치히, 그 파란만장한 역사

오늘날의 폴란드 북부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그단스크는 이 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대도시권이자 대표적인 항구도시다. 중세시대부터 조선업과 해양무역업으로 유명세를 떨쳤으며 14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한자 동맹의 중심지 중 하나로 큰 부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눈독 들이는 자들이 많았던 까닭에 파란만장한 세월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 프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이 지역은 1920년부터 1939년까지는 자유시*로서 존재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나치 독일에 합병되었다. 이어 전쟁 말기 소련에게 점령당했으나 종전 후에는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치히 자유시(Free City of Danzig): 지금의 그단스크 지역에 있었던 도시 국가를 의미한다. 1919년의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립한 곳으로 95%의 주민은 독일계, 나머지는 폴란드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단스크 기차역 앞 광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아이들이 그단스크를 벗어나 타 지역으로 대피했던 일을 기념하는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단스크를 다시 방문한 것은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오래전, 스웨덴의 항구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하룻밤을 꼬박 물살을 가른 후 도착한 곳이 바로 그단스크였다. 정든 친구와 그의 가족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기에 이어진 폴란드 여행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계절이 겨울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장소가 단치히, 오늘날의 그단스크라는 사실이 내 안에 선입견을 단단히 심어놓았던 것일까?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도시를 떠올리노라면 어둡고 축축한 기분이 가장 먼저 엄습해오곤 했었다.


조금 더 따뜻한 계절에 다시 찾은 그단스크는 내 기억 속에서의 모습보다 더 젊고 더 밝은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어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인 귄터 그라스(Günter Wilhelm Grass)는 단치히 교외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치히 3부작’을 썼다. 그중 하나가 『양철북』으로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이 도시의 풍경이 담겨 있기도 하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방문할 지역을 배경으로 쓰인 책, 또는 그 지역과 인연이 있는 작가가 쓴 책을 읽는 것을 즐긴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러한 글들은 내가 방문할 장소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도서관을 방문한다면 어쩌면 그단스크와 관련된 특별한 책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희망을 품고 복잡다단한 과거를 짊어진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1905년에 이전한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과 주변의 20세기초 풍경 ©Gdańsk Library of the Polish Academy of Sciences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오늘날의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 건물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

발길이 멈춘 곳은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Gdańsk Library of the Polish Academy of Sciences)이었다. 문학 작품에서 시작된 궁금증을 안고 찾아간 곳이 하필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이라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조차도 엉뚱한 곳을 목적지로 택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내심 스스로가 우스웠으니까. 그러나 나를 맞이해 준 직원에 따르면 폴란드어로 이 도서관의 이름은 Polska Akademia Nauk Biblioteka Gdańska이며 여기에서 ‘과학(Nauk)’은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좁은 의미에서의 자연과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학습과 교육 전반을 일컫는 말로써 이곳에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지난 1951년, 기존에 존재하던 몇몇 학술기관들이 통합되어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PAN: Polska Akademia Nauk)라는 이름의 고등교육 진흥 기관이 탄생했다. 내가 방문한 도서관도 이 기관에 속한 곳이었다.


1596년부터 오늘날까지

때로 행운은 우연의 손을 잡고 찾아오기도 한다. 먹고 살 걱정을 덜고 나면 사람들은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부가 모여들던 도시답게 그단스크에서는 16세기부터 이미 공공 도서관 건립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 무렵의 어느 여름날,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부유한 귀족인 보니파시오 후작이 탄 선박이 이 도시에서 발트해로 흘러 들어가는 비스와 강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당시 배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1,500권이 넘는 르네상스 서적들이 함께 실려 있었는데 장서 목록에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신학, 법학, 의학, 철학, 문법, 수학, 점성술 등 다양한 분야의 훌륭한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틴 루터 등의 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나폴리 종교재판소와 대립하던 중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보니파시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그단스크에 정착했고 여생 동안 시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대가로 자신이 모은 책들을 시의회에 기증했다 한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날로부터 5년 후인 1596년 6월, 보니파시오로부터 기증받은 장서를 바탕으로 그단스크 시의회 도서관이 문을 연다. 이후 도서관의 위치와 소속, 이름 등이 몇 차례 변경되었으나 전통은 지금의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으로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의 전신인 그단스크 시의회 도서관의 이름과 최초의 장서 기증자인 보니파시오 후작의 모습이 생겨진 명판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의 주요 역할은 국가가 보유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자체적으로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것과 더불어 이용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참고 자료를 제공하는 등의 지원활동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은 지속적으로 장서를 획득, 색인화하는 동시에 디지털 도서관을 구축해오고 있다. 장서 확충은 대부분 구매를 통해 이뤄지지만 1660년부터는 지역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의무적으로 기증받고 있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오래전 보니파시오가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이 수집한 책을 기증하는 전통 또한 이어져오고 있다는 설명에 스쳐가는 방문자일 뿐인 나조차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의 고향으로부터 멀고 먼 땅에 지식의 창고를 건립하기 위한 씨앗을 심어준 한 이탈리아인이 기증한 보물들은 오늘날까지도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방대한 소장 자료들

보니파시오의 기증 도서들을 언급한 김에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면,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을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뭐니 뭐니 해도 방대한 소장자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온 도서관답게 이곳은 그단스크와 발트해 연안 지역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역사와 건축, 행정, 종교, 경제, 음악, 사회정치학 등 다양한 주제와 관련한 오래된 자료부터 오늘날에 만들어진 자료까지를 두루 소장하고 있다. 11세기 초에 쓰인 종교적 내용을 담은 자료와 12세기에서부터 내려온 마틴 루터의 자필이 담긴 사료부터 시작해서 중세시대의 교회와 수도원에서 보관해 오던 사료들, 여기에 덧붙여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작된 고서들이 소장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인쇄된 서적과 기타 인쇄물 컬렉션은 폴란드 전체를 통틀어 가장 풍부한 것으로 약 64,000여 점을 헤아린다고 한다. 이 지역의 풍경이 담긴 수 백 년 전의 채색화와 17세기 그단스크의 시장이자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렸던 요하네스 헤벨리우스가 남긴 모든 작품, 그리고 17세기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발트해 해양지도를 포함한 12,000여 점의 지도 컬렉션 등도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는 가치 있는 자료 중 일부다. 오늘날 가장 중점적으로 수집하고 있는 것은 폴란드 북부 지역과 발트해 연안 국가와 관련한 것들이란다. 1860년경에 촬영된 사진을 비롯하여 20세기에 들어설 무렵 그단스크의 건축물들이 담긴 사진 인쇄물이나 필름, 엽서를 비롯한 60,000 점 이상을 소장 중이며 이 도시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록-그단스크가 단치히 자유시였던 시절 폴란드인들의 활동상, 전쟁을 촉발한 베르테르플라테 전투와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등에 대한 기록- 또한 보유하고 있다.


100년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도서관 건물의 내부


도서관을 만나는 여러 가지 방법

현재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자리 잡은 두 개의 건물에서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1905년에 지어졌다는 첫 번째 건물에는 아카이브 시설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출판물이 보관되어 있고 첫 번째 건물이 문을 연지 정확히 100년 후인 2005년에 문을 연 두 번째 건물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출판된 서적 등이 주로 보관되어 있다. 그러니 살펴보려는 자료에 따라 방문할 장소를 선택하면 될 것이다. 첫 번째 건물 내부에 있는 전시 공간에서는 도서관이 보유한 귀한 자료들이 정기적으로 전시되고 있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희귀 자료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이벤트나 강연 등의 프로그램도 지속적으로 운영된다. 행사 안내는 도서관이 운영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공지가 된다.


도서관의 소장자료들은 도서관 내부에 있는 전시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2005년에 문을 연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 별관
도서관 별관 앞에 설치되어 있던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설명문


오랜 시간 존재해 온 것들에는 분명 그것만이 지닌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1596년에 문을 열었으니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은 올해로 무려 개관 428년을 맞이하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지닌 도서관이다. 지난 수 백 년을 살아낸 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유산들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나누기 위한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의 노력은 앞으로 다가올 더 긴 시간 동안에도 이 공간의 존재를 더욱 확고히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고처] 월간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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