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Feb 19. 2024

내 안의 또 다른 나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이현경 옮김), 민음사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이현경 옮김), 민음사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 보이는 테랄바의 메다르도 자작은 투르크 인들을 상대로 벌어진 싸움에 별생각 없이 참전한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 참여한 첫 번째 날, 무식한 것인지 용맹스러운 것인지, 대포를 향해 막무가내로 돌진했다가 온몸이 찢기 만다. 이게 실제 상황이었다면 자작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도 골백번은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작가는 메다르도 자작을 되살려 놓는다. 그것도 아주 신기한 방법으로. 야전병원 의사들과 때마침 전쟁터를 지나던 수행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메다르도 자작의 몸을 주워 모은 후 그것을 이어 붙여 두 명의 인간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한쪽 귀, 한쪽 뺨, 반쪽 코, 입 반쪽으로 시작해 몸의 정확히 오른쪽 절반과 오른 다리만으로 살아남은 (오른쪽) 반쪼가리 자작과 남은 반대편 몸만으로 살아남은 (왼쪽) 반쪼가리 자작의 모습으로 말이다.


『반쪼가리 자작』은 쿠바에서 태어나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의 경험을 쌓아온 이탈리아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 10. 15. ~ 1985. 9. 19.)가 쓴 우화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온몸이 부서진 인간이 이미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이어 붙였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마치 우리의 전래동화 ‘반쪽이’ 이야기에서처럼 몸의 정확히 반쪽만으로 구성된 두 명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다니, 이야기의 출발부터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참 신기하다. 설정 자체부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자작의 이야기가 어쩌면 우리네 사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영 상관없지 만은 않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걸 보면.


한 명의 인간 안에는 다양한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서로 다른 모습들은 때론, 정말로 한 생명체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극과 극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른쪽 반쪼가리 자작은 메다르도 자작의 악한 부분만 오롯이 모여 탄생한 인물이다. 반면, 왼쪽 반쪼가리 자작은 같은 인물의 선한 면만을 긁어모아 만들어진 인물이다. 이렇듯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극단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삶을 얻은 주인공은 시간 차를 두고 따로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데 그들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시선이 닿는 곳에 있는 존재들을 마치 자신처럼 반쪼가리로 만들어 버리는 등 악행을 일삼는 오른쪽 반쪼가리 자작의 존재에 마을 사람들은 긴장하고 그를 피하고 결국엔 저주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선한 면으로만 구성된 왼쪽 반쪼가리 자작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 이제 그만 좀 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옳은 말, 선한 주장만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는 그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조차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데 악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그렇다 쳐도 선에 대해서까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아마도 그것은 선이든 악이든 그 어느 한쪽으로만 온전히 치우친 순도 100%의 인간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선하다고 평가받는 이들 안에도 악은 숨겨져 있고 악한 이들 안에도 선함은 살아 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는 짧은 분량의 소설인 데다 의외의 해피엔딩(?) 덕분에 읽으면서는 즐거웠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다. 내 안에도 숨겨져 있을 게 분명한 서로 다른 모습들이 발가벗겨져 선명하게 드러난 것만 같은 기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