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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Mar 12. 2024

기후동행카드 한 장에 담긴 사랑

그 아빠에 그 아들

부르르르. 진동모드로 해 두었던 전화기가 울린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부부는 여행이에게 핸드폰을 사주었다. 서울만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는 아이 혼자, 또는 아이가 친구들하고만 돌아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어딜 가든 내가 여행이를 자동차로 태워다 주었고 아이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도착한 장소에서 함께 있거나 혹은 그 부근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데려왔기 때문에 지금 나의 아이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안전하게 놀고 있는지 걱정할 일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꼬마에게는 핸드폰이 굳이 필요 없다는 생각도 한몫했던 게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아이가 한국의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래서 결론만 말하자면, 매일같이 핸드폰 가게 앞에서 시간을 끌며 자기가 갖고 싶은 핸드폰을 고르는 우리 집 꼬마에게 우리는 결국 그 조그만 (때로는 몹쓸) 기계를 사주고야 만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 줄 때까지는 고민이 많았지만 막상 아이에게 핸드폰을 쥐어 주고 나니 정작 마음이 편해진 것은 나였다.


여행이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학교엘 다니는 터라 적어도 몇 주 간은 등하굣길 교문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건 엄마 마음이고 어느덧 고학년 형님이 된 아이는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등하교를 하고 싶어 했다. 특히 하교 후에는 친구들과 단 삼십 분만이라도 놀이터에서 놀고 싶어 하는데 여행이에게 아직 핸드폰이 없을 땐 하교 시간이 지나서까지 연락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는 아이를 기다리며 나의 마음이 참 많이 불안했었다. 학교가 아파트 단지 안, 엎어지면 코 닿을 위치에 있는 데도 엄마 마음이란 참... 하지만 핸드폰을 장착한 여행이는 이제 하교 시간이 되면 나에게 전화를 한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뛰어가며 전화를 거는 듯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오늘은 OO랑 놀이터에서 한 시간만 놀다 집에 갈게."라든지 "나 지금 OO이랑 오뎅이랑 떡볶이 사 먹으러 가는 중이야."라든지 여하튼 제 할 말을 재잘재잘 던져 놓고는 다시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 제 갈 길을 간다. 비록 내가 전할 말은 시작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내 아이가 지금 안전하게 잘 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그때마다 나는 핸드폰님께 절이라도 올리고픈 심정이 되어버린다.


지난주의 어느 날 아이의 하교 시간. 이제 일 이 분 후면 여행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테지? 아이가 전화를 걸어 할 말이라는 것이 매일 대동소이하지만 몇 시간 만에 내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나는 기대를 가지고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부르르르. 진동모르도 해 두었던 전화기가 울렸다. 그런데 아이의 목소리가 다른 날과는 달랐다. 차분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진지하다고 해야 할까. 여행이는 4학년이 되어 친해진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편의점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 엄마는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어?"라고 물었다. 내 생일까지는 아직 몇 달이나 남았는데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지 의아했다. 그리고는 그걸 갑자기 왜 묻냐고, 엄마는 다른 건 필요 없고 네가 사랑만 주면 된다고 대답했는데 아이는 그게 아니란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은 그게 아니고 정말로 무얼 받고 싶냐는 거였다. 뭐라도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여행이는 "그럼 알겠어. 친구랑 간식 사 먹고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갈게."라더니 다시금 전화를 뚝 끊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여행이가 내 얼굴을 살피며 활짝 웃더니 나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기후동행카드였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엄마가 편의점에서 기후동행카드 사려고 할 때마다 다 팔렸다고 해서 못 샀잖아. 그런데 오늘 갔던 편의점에서 이걸 팔길래 샀어."란다. 그러면서 이건 엄마 생일 선물을 미리 주는 거라고 덧붙였다.



사실 나에게는 기후동행카드가 필요 없다. 정기적으로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요 대중교통을  일이 많지도 않은 나에게는 매월 최소 62,000원을 충전해서 기후동행카드를 사용하는 것보다 필요할 때마다 결제를 해가며 돌아다니는 것이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내가 편의점에서 그 카드를 몇 번이나 사려고 했던 이유는 정기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남편에게 사주고 싶어서였지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랑 방문했던 편의점에서 엄마를 떠올리고 기후동행카드가 있냐고 물어봤을 여행이의 마음 때문에, 그리고 얼마 되지도 않용돈에서 엄마에게 주겠다고 삼천 원이나 써가며 엄마가 애타게 찾던 물건을 여행이의 마음 때문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여행이가 사 준 귀한 기후동행카드를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삼키는데 문득 오래전 나의 신혼 시절의 화이트 데이가 떠올랐다. 결혼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화이트 데이였지만 나는 기념일 같은 걸 챙기는 세심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닌 터라 아침나절부터 "오늘 저녁은 어디에 가서 먹을까?"라고 묻는 남편에게 센스 없게도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니 그냥 집에 와서 먹자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내가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사탕 같은 거 사지 마."라고까지 덧붙였더랬다. 하지만 이렇게 분위기 깨는 소리만 골라하는 재주를 지닌 나에게 고맙게도 남편은 그날 저녁, 선물을 챙겨주었다. 하트가 그려진 화이트 데이 사탕 박스와 더불어 두구두구두구두구 20개들이 사또밥 한 박스! 그렇다. 사또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였는데 그걸 찾는 사람이 적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슈퍼에서든 마트에서든 점점 구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와 남편은 몇 번이나 사또밥 사러 들어간 가게에서 빈 손으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실망하는 나를 본 남편이 그걸 기억하고는 화이트 데이 선물로 사또밥을, 그것도 한 박스나  사 준 것이었다. 그날의 고마움, 그 사랑받는 느낌, 평생 잊지 못해!!!


결혼 후 첫 화이트 데이에 받은 선물. 그리고 그 선물을 챙겨들고 석모도로 여행을 다녀왔던 날

사또밥 한 박스를 선물 받은 날로부터 십 년 이상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여행이는 친구와 함께 있는 바쁜 와중에도 엄마를 떠올려준 고마운 소년으로 자랐다. 그 아빠에 그 아들, 고마운 나의 두 남자. 그들로부터 받은 사또밥의 기억과 기후동행카드 덕분에 벌써부터 따뜻한 봄이 내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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