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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Nov 13. 2020

워싱턴 DC가 매력적인 이유

스미소니언이라는 그 이름


1765년 프랑스 파리(Paris)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프랑스에서의 유년 시절을 뒤로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옥스포드대를 졸업한 이후인 22세 때부터 유럽 전역을 돌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과학자로도 이름을 남긴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한다. 그의 어머니는 튜더 왕조 헨리 7세(Henry VII)의 직계비속으로 명예와 부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주로 모계(母系)로부터 상속받은 자신의 전재산을 조카에게 모두 남기고 만약 조카가 죽게 되면 그것을 미국의 워싱턴 DC(Washington, D. C.)로 보내 인류의 지식 발전과 보급을 위한 재단을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1829년 이탈리아의 제노바(Genoa)에서 숨을 거둔다.


살아생전 미국 땅을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던 그의 이름은 제임스 스미손(James Smithson)이며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재단은 스미소니언 재단(The Smithsonian Institution/ 이하 스미소니언)이다.


스미소니언은 19개의 박물관, 미술관과 더불어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중 뉴욕(New York)과 버지니아의 챈틸리(Chantilly)에 위치한 세 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자리하고 있다. 스미소니언이 운영하는 곳들은 놀랍게도 관람객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는데 이 거대한 기관의 운영에 드는 비용의 2/3 가량은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의 기부, 기념품 판매, 스미소니언 재단의 라이선스 수입 등으로 충당하고 있단다.

스미소니언이 운영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돈 한 푼 안 내고 본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로 알찬 컬렉션을 자랑한다. 꼬박 일주일을 투자해도 모자랄 정도로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덕분에 워싱턴 DC에서 몇 년을 보낸 우리 가족은 틈나는 대로 멋진 박물관이며 미술관들을 공짜로 마음껏 둘러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중 내가 가장 즐겨 방문했던 곳은 스미소니언 미국 예술 박물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과 국립 초상화 박물관(National Portrait Gallery)이었다. 곳이 한 건물을 나눠 쓰고 있기 한 번 걸음 한 김에 두 개의 미술관을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장소라고나할까.





매주 화요일이면 나는 이 건물에 있는 루체 파운데이션센터(Luce Foundation Center)로 향하곤 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그림 그리기 워크숍(Draw and Discover)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참여자들은 센터에 전시된 작품을 둘러본 후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나 조각을 자유롭게 골라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내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혼자서 그림을 그린 후 다시 둥그렇게 모여 앉아 각자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이들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림그리기 워크샵에서 내가 그린 그림들.


워크숍 리더는 미술을 전공한 분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그림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이들이었다. 그림을 매개로 낯선 이들과 은밀한 속마음을 주고받는 경험은 어디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워싱턴 DC에 머물던 당시, 난 고국에 계시던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밖에도 나가기 싫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싫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던 그 시기, 루체 파운데이션센터의 그림 그리기 워크숍은 나를 살리려 하늘에서 내려보낸 동아줄과도 같았다.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함께 참여하는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상실의 아픔은 신기하게도 조금씩 조금씩 옅어져 갔다.




건물 중앙에는 실내 정원 격인 코곳 코트야드(Kogod Courtyard)가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나면 습관처럼 그리로 향했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장소를 벗어나 집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곳을 지나야 한다는 핑계였지만 어쩌면 찾아보면 또 다른 통로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굳이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늘 코곳 코트야드 방향으로 향했다.  공간을 지나쳐 곧바로 출구로 향는 날은 드물었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처럼 나는 그곳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는 의자에 기대앉아 실내 정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했다.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멋진 유리 천장을 가진 그곳에서는 작은 콘서트가 열리거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종종 진행되었다. 그것들을 즐기는 것은 마치 물건 하나를 샀을 뿐인데 예전부터 꼭 갖고 싶었던 다른 무언가가 사은품으로 딸려 나오는 것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게다가 내 지갑을 연 것은 커피값을 치를 때뿐, 그 모든 즐거움을 누리는 데 추가로 드는 돈은 없었다.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모두 동등하게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도 부럽다는 생각을 나는 하고 또 했다.




이곳에서 본 공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March on Washington 50주년을 맞이해 진행된 재즈 콘서트였다. 1963년, 일자리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모여들었던 25만 명의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콘서트였기에 196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인권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Max Roach, John Coltrane, Charles Mingus, Cal Massey의 곡들이 그날의 플레이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과거,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음악을 통해 인종 차별 정책을 거부하고 사회 정의를 되찾기 위한 메시지를 전달했단다. 내가 본 것은 당시의 그 열띤 분위기가 21세기, 워싱턴 DC 한복판에서 고스란히 재현된 것만 같은 공연이었다.




밴드의 리더이자 드러머인 Nasar Abadey 씨는 연주 중간중간 각 작품에 대한 소개도 하고 이번 공연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한 번은 그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분들 중에 1960년대를 지나온 분이 있다면 손들어 보세요."


"그렇다면 1960년대에 재즈를 들어본 적이 있는 분은요?''


그러더니 그는 1960년대에 재즈를 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당시 공연장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기억이 나는지 물었다.


그는 말했다.


"지금 여러분의 옆자리에 앉은 얼굴을 둘러보세요. 한 때는 인종분리정책 때문에 백인 관객과 흑인 관객이 한 자리에 앉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흑인 관객들은 발코니나 지하 같은 곳에 따로 마련된 좌석에만 앉을 수 있었죠. 백인과 흑인은 한 곳에서 식사를 하지도, 물을 마시지도 못했어요. 화장실에 갈 때도 건물의 서로 다른 출입구를 사용해야만 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처럼 온갖 인종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음악을 듣지 못했던 시절,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무기로 현실에 맞서 싸웠어요."



워싱턴 DC에서 지내는 동안, 그곳에서 평생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그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그곳에서 수혈받은 기억들을 기록했다. 두 발이 묶인 요즘 같은 시기, 워싱턴 DC에서 즐겼던 문화생활의 기억은 더욱 소중하다. 그중에서도 스미소니언 재단과 얽힌 추억들은 생각할수록 감사할 따름이다.


일상 속에서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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