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울 푸드
"회원님, 앞으로 3달간 식사는 반공기만 드시고요.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은 최대한 피해 주시는 거 알죠? 드신 음식 칼로리 다 여기에 적어주세요." 처음 PT를 끊고, 트레이너 선생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장 먼저 인터넷으로 찾은 것은 육개장 1인분의 칼로리였다.
1인분에 310칼로리. 다이어트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것. 빨간 국물에 대파가 송송, 큼직하게 썰은 소고기 고명에 시원한 무와 고사리가 들어간 육개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기호에 따라 토란대를 넣기도 하고 당면을 넣기도 하지만, 속에 뭐가 들었든 무슨 상관인가? 뜨끈하게 공깃밥을 푹푹 말아 후후 불어 후루룩 먹고 나면 속에 있던 스트레스가, 스멀스멀 들어오던 감기 기운이 다 가시는 기분이다.
언제부터 육개장을 좋아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아마도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유년 시절부터이었을 것이다. 4살 때부터 매운 김치를 좋아했고, 우리 집에 놀러 온 사촌언니가 새빨간 국물을 떠먹는 게 왠지 멋있어 보여 따라 맛보았던 그때부터 진하고 매운 고기 국물 맛에 빠져들지 않았을까? 소고기로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고춧가루와 고추기름이 매운맛을 더하고, 참기름이 고소한 맛을, 그리고 무가 달착지근한 맛을 더한다. 고사리가 잘근잘근, 대파가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까지 더해진 육개장 속에 모든 인생의 맛이 담겨 있다는 매력을 나는 조금 일찍 깨달은 것 같다.
사춘기 시절을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캐나다의 시골 깡촌에서 보냈다. 당시에 유일한 낙은 수요일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매주 수요일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차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한인 마트에서 장을 봐오셔서, 얼큰한 국물의 육개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샌드위치, 감자튀김만 먹다가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얼큰한 국물이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는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매주 수요일을 기다리며 1년을 버티고, 한국에 돌아오던 날이면 새벽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던 것은 엄마가 그 전날 밤부터 정성을 들여 끓인 육개장이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육개장도 맛있었지만, 1년 만에 보는 딸을 손꼽아 기다리며 셀 수 없이 많은 스푼의 정성과 사랑으로 푹 고운 엄마의 육개장 맛은 감히 어떤 것 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된 후, 생일이면 미역국 대신 엄마가 끓여 주시는 얼큰한 육개장을 먹었고, 회식을 하고 속 쓰린 다음 날에는 해장으로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출근하곤 했다. 친한 친구들은 나의 육개장 사랑을 익히 알고 있어 독립을 하면 본가 근처에 꼭 붙어살던지, 프랜차이즈 육개장 식당이 많은 육세권에 살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결혼을 생각하던 친구와 헤어지고 며칠을 울면서 식음전폐를 하던 나에게 엄마가 그래도 먹고살자며, 차려 주신 밥상에도 역시 고기와 대파가 듬뿍 얹어진 육개장이 있었다. 그날은 엄마가 나 대신 그 나쁜 놈을 곱씹으며 고춧가루를 팍팍 넣으셨는지 유난히 더 맵게 느껴졌다. 매운 육개장을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 다 비우고 나니, 지나간 사랑에 대한 나쁜 생각도, 일말의 미련도 조금은 비워지더라.
새벽녘에 출근해 오늘이 아닌 내일 퇴근하는 요즈음 같은 날에는 따끈따끈한 공깃밥과 함께 엄마의 칼칼한 육개장이 생각이 난다. 육개장 한 그릇을 다 비우면, 나의 스트레스도, 노곤함도 다 비워질 것 같다. 밤늦은 퇴근길 음악 스트리밍 앱에서 흘러나오는 다이나믹 듀오의 “어머니의 된장국” 노래 가사처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때 그 식탁으로 돌아가고 픈' 엄마의 육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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