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래자연휴양림&큰지그리오름
연둣빛 이파리들이 경쾌한 몸짓으로 팔랑거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숲길을 비춘다. 곶자왈 숲을 걷는 시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따라 걷다 보면 콧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국내 최초의 곶자왈 자연휴양림
곶자왈은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돌투성이 암반 지대에 나무와 덩굴, 가시덤불 등이 뒤섞여 숲을 이룬 제주도의 대표적인 생태 지형이다. 곶자왈 숲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바라보기에 놀랍고 신비로운 면이 많다. 무엇보다 난대와 온대 식물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독특한 식생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서로 다른 기후대를 살아가는 식물들이 같은 공간에 뿌리를 내린 모습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생태다. 실제 곶자왈에는 따뜻한 해안가에서 자라는 주름고사리와 고산 지대인 한라산 상부에 서식하는 좀고사리가 함께 살아간다. 지형적인 특성상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는데, 한겨울에도 푸릇한 숲은 섬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생태계의 허파이자 세계적인 보존 가치를 지닌 대를 이어 지켜가야 할 보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곶자왈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곡식을 재배할 경작지를 최고로 치던 시대에 화전조차 일구기 어려운 돌무더기 땅은 불모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그 덕분에 곶자왈은 천연림에 가까운 형태로 보전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곶자왈 지대는 한라산 중턱부터 해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한경-안덕 곶자왈, 애월 곶자왈, 조천-함덕 곶자왈, 구좌-성산 곶자왈 4개 지대로 나뉜다.
제주 동북부 지역에 넓게 퍼진 조천-함덕 곶자왈 지대에는 2011년 문을 연 교래자연휴양림이 있다. 국내 최초로 곶자왈에 조성된 자연휴양림이다. 230만㎡ 남짓한 넓은 부지에 숙소, 야영장, 생태 체험관 등 여러 가지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무성하게 우거진 숲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신비로운 곶자왈의 생태를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다. 원시적인 천연림을 헤매다 보면 마치 꿈결 속을 걷는 듯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초록인 세상.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엔 풀과 나무들이 저마다 품안에 감춰 놓았던 빛깔을 꺼내들고 잔치를 벌인다. 이럴 때 숲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아닌 어느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미묘한 시간에 있는 듯하다.
곶자왈, 그 신비로운 숲을 걷다
교래자연휴양림 탐방 코스는 곶자왈 지대만 짧게 둘러보는 생태 관찰로와 큰지그리오름까지 두루 살펴보는 오름 산책로 2개로 나뉘며 각각 40분,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왕복 기준). 곶자왈 탐방이 처음이라면 이보다 시간을 넉넉히 잡는 것이 좋다. 평소 접하기 못했던 낯선 풍경에 자꾸만 발걸음이 멈춰 서게 된다.
숲은 처음부터 끝까지 울퉁불퉁한 돌길이다. 휴양림이라고 해서 산책하기 좋은 탐방로를 떠올렸다면 일찌감치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사색에 잠겨 걷을 만한 숲은 아니다. 전에 멋모르고 가벼운 운동화 차림으로 나섰는데 불쑥 튀어나온 돌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프고 자주 삐끗했다. 그 때 이후론 곶자왈 탐방엔 무조건 트레킹화를 신는다. 바닥이 탄탄하고 발목을 고정시켜주니 훨씬 안전하고 피로감도 쉽게 풀린다.
울퉁불퉁한 건 돌길만이 아니다. 흙이 부족하다 보니 땅속으로 뻗어나가야 할 나무뿌리가 지면 위로 드러나 단단하게 굳었다. 그 때문에 걸을 때마다 이리저리 발길에 차여 괜스레 미안해진다. 이 같은 모습을 판근 현상이라 하는데 곶자왈 숲에서 흔하게 보인다. 거친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이 대단할 따름이다. 더 경이로운 것은 바위나 돌 틈에서 자라는 나무들이다. 흙 한 줌 없는 척박한 환경을 이겨낸 강인한 생명력이 큰 감동과 울림을 준다. 거대한 바위를 휘감고 자라난 고목이 신기해 살며시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었는지 우람하게 자란 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단했다.
인적 드문 숲은 새와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주인이다. 운이 좋으면 숲의 터줏대감인 노루와도 눈인사를 나눌 수 있다. 곶자왈은 양치류와 고사리의 천국이기도 하다. 교래자연휴양림에도 수많은 종류의 고사리들이 자라고 있다. 이제껏 고사리는 식탁에 올라가는 나물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종류의 고사리가 있을 줄이야.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자리에 거대한 양치식물이 나 보란 듯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 큰지그리오름까지
휴양림 내 숲길과 이어진 오름 탐방로를 따라가면 큰지그리오름에 닿는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오름 아래 빽빽하게 자라난 편백나무들이다. 오름을 다 덮어버릴 것처럼 기세 좋게 뻗어난 편백나무들이 또 다른 감흥을 선사한다. 편백나무는 몸에 좋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삼림욕하기 좋은 나무 가운데 하나다. 군데군데 쉬어가기 좋은 쉼터가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본다. 편백나무 특유의 향긋한 내음과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숨을 몇 번 들이마셨을 뿐인데 왠지 건강해진 기분이다. 숲이 주는 선물을 즐기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본격적인 오름 탐방이 시작된다. 큰지그리오름은 비고 118m 정도인 전형적인 말굽형 오름으로 정상까지 약간의 산행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 험한 길은 아니니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 비탈진 기슭을 따라 가는 탐방로는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맞댄 터널을 지나면 풀밭처럼 보이는 조릿대 군락이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이름 모를 풀꽃들과 명랑한 새소리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큰지그리오름은 동부 중산간 지대의 전망대 역할을 한다. 정상에는 전망 데크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 서면 한라산부터 바다까지 섬이 품은 보물들이 한눈에 담긴다. 그리 넓어 보이던 숲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풍경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찬 바람에 신발 끈을 동여매고 천천히 발길을 돌린다. 그 풍경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할 때이다.
주소 : 제주시 조천읍 남조로 2023
TIP.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의 숲길 탐방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숲은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흐린 날과 맑은 날은 물론 비 오는 날 걷는 숲은 비록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교래자연휴양림은 그 편차가 꽤 큰 편이다. 특히 비 내린 전후와 햇살이 쨍한 날은 서로 다른 곳으로 착각할 만큼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이런 까닭에 시간 여유만 된다면 날씨를 달리해 2~3번 숲길을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다녀갈 때마다 이전엔 찾지 못했던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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