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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6. 2023

봄날의 오름 산책

큰사슴이오름과 작은사슴이오름

봄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깔린 고운 비단길을 걸었다.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큰사슴이오름과 작은사슴이오름이 나란히 서 있다.     

 

유채꽃밭 너머 나란한 오름 형제

구좌읍 송당리와 표선면 가시리 사이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가로지르는 긴 도로가 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녹산로’이다. 평소엔 차들이 드문드문 다니는 한적한 길이지만 봄철만 되면 수많은 차량들로 때 아닌 교통체증이 벌어진다. 유채꽃길이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약 10km에 걸쳐 이어진 꽃길 가운데는 유채꽃과 벚꽃이 함께 피어난 환상적인 구간도 있다.  

중간 즈음에 큰사슴이오름과 작은사슴이오름이 있다. 산체가 큰 것이 큰사슴이오름이고 숲처럼 보이는 것이 작은사슴이오름이다. 오름의 형태가 사슴과 비슷해 크기에 따라 큰사슴이, 작은사슴이로 구분해 불리는데 또 다른 설로는 이곳에 사슴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옛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대록산(大鹿山), 소록산(小鹿山)이라 불렸다. 종종 오름 이름 뒤에 ‘산(山)’ 자가 붙은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나 제주로 유배를 온 선비들이 산체가 큰 오름들을 육지의 산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대록산, 소록산을 비롯해 영주산과 단산, 군산 등이 비슷한 경우다.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를 펼치는 큰사슴이오름

큰사슴이오름은 비고가 125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해발 높이는 474.5m로 표차가 큰 편이다. 정상까지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해 다소 힘이 들긴 하지만 나무 계단과 목침이 적당한 보폭으로 놓여 있어 그나마 다행라 해야 할까. 햇빛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한낮엔 땀흘릴 각오는 하고 올라야 한다. 

큰사슴이오름은 주차장에서 입구까지 포장로를 따라 약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유채꽃프라자에 주차한 후 갑마장길을 따라 가도 된다. 어느 쪽이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하다. 넓은 들판을 지나 입구에 도착하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곧바로 정상을 밟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둘레길을 따라 간 후 반대편에서 정상을 오르는 길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면 둘레길을 따라가기를 권한다. 완만한 경사로 이어진 둘레길을 이용하면 정상까지 한결 손쉽게 오를 수 있다. 내려올 때 펼쳐지는 경관은 덤이다.

정상에 서면 한라산과 오름 군락이 한 눈에 담긴다. 흰 구름에 둘러싸인 채 오름을 품에 안은 한라산은 신비로운 영산이다. 큰사슴이오름과 맞닿아 있는 작은사슴이오름도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작은사슴이오름을 보며 문득 옛 사람들이 본 사슴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진다. 아마도 그들이 본 것은 노루일 것이다. 지금도 노루는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큰사슴이오름은 정상에 두 개의 분화구를 가지고 있다. 언덕을 넘어 정상부에서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면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오솔길이 샛길처럼 트여 있는데 이 길을 따라 큰 분화구 둘레를 돌 수 있다. 잡목림이 무성한 좁은 산길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데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어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만 호기심이 충만한 이라면 한번쯤 다녀올 만하다.   

서쪽 비탈면을 따라 정상에 올라왔다면 반드시 반대쪽 길로 내려가야 한다. 큰사슴이오름이 품은 나머지 비경을 놓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정상에서 몇 걸음 걷자마자 탄성이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북동부 지역에 펼쳐진 오름 군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오름들이 자신을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름 군락부터 남쪽의 푸른 바다까지 이어진 장관은 사진 한 컷에 담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두 개 오름을 가로질러 걷는 둘레길

오름 중턱부터는 둘레길과 합류하게 된다. 푸른 목초지와 건너편에 보이는 따라비오름이 마지막을 장식하고 나면 출발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오는데 약 1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큰사슴이오름 아랫 자락을 크게 도는 둘레길은 걷는 이가 별로 없어 호젓하게 걷기 좋다. 큰사슴이와 작은사슴이 오름 사이를 지나가는 구간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중잣성도 남아 있다. 잣성은 중산간 목초지에 쌓은 목장 경계용 돌담으로 옛적 이 일대에 최고 등급의 말을 키워내는 갑마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낡은 잣성만이 남아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번잡한 생각들을 비워내기에 걷기만큼 좋은 것은 없다. 말없이 조용히 걷고만 싶을 때 큰사슴이오름 둘레를 자박자박 걸어보자.     


정석비행장이 내려다보이는 작은사슴이오름 

작은사슴이오름은 정석비행장 맞은편에 출입구가 있다. 출입구가 도로에 인접해 주의해서 살펴야하며, 주차 시설이 없기 때문에 부근 공터에 차를 세워두거나 큰사슴이오름에서 걸어가야 한다. 작은사슴이오름은 인적이 드물어 동행을 이뤄 탐방하기를 권한다. 

길을 따라 비탈진 경사면엔 삼나무가 숲을 이루고, 맞은편엔 풀밭이 펼쳐져 있다. 외길을 따라 약 7~8분 정도 걷다 보면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오른쪽에 난 오솔길로 접어들면 정상까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오솔길은 언뜻 보면 카펫이 깔린 것 마냥 푸른빛이다. 길이 좁고 습한 환경 탓에 바닥 곳곳에 이끼가 두텁게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판타지 영화에 등장하는 마법 숲처럼 보인다. 마른 나뭇잎이 이끼 위에 덮여 있어 걸을 때는 푹신한 느낌마저 든다.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석비행장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등성이에 닿는다. 온통 나무들로 막혀 있는 한 쪽에 시야가 트인 곳이 있어 자리를 옮겼다. 정석비행장과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명당 자리다. 마침 비행훈련을 마친 항공기가 활주로 위로 내려서고 있었다. 큰사슴이오름에서는 활주로가 무척 멀어 보였는데 여기서는 무척 가깝게 보인다.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동안 엄청난 굉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진다.  솔방울이 가득 떨어진 언덕진 소나무 숲을 오르면 곧 정상에 다다르게 된다. 풀숲이 우거진 정상부는 조릿대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자라나 있다. 작은사슴이오름은 가슴이 뚫리는 것 같은 시원한 전망은 없지만 고립무원에 놓인 것 같은 이색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끈다. 되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쉽지 않은 이유다.        


주소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68(큰사슴이오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87-1(작은사슴이오름)


TIP. 

탐방 후에 감미로운 커피 한 잔유채꽃프라자

서귀포시 가시리권역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건축된 유채꽃프라자는 숙박시설과 카페, 세미나실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일반 관광객은 물론 단체 연수도 가능하며 큰사슴이오름과 가까워 탐방객들도 많이 찾는다. 2014년 한국농촌건축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건물은 또 다른 볼거리다. 건물 앞에 설치된 커다란 의자도 인생 포토존으로 통할 만큼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주소 : 서귀포시 표선면 녹산로 464-65

문의 : 064-787-1665 www.gasifarm.com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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