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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1. 2023

섬의 시작과 끝에 마주한 닮은 꼴 오름

지미오름과 말미오름

옛적에 제주 사람들은 서쪽 끝을 섬의 머리로, 동쪽 끝을 꼬리로 여겼다고 한다.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마주보고 있는 그곳에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지미오름이 솟아 있다. 투명한 쪽빛 바다와 아기자기한 마을을 품은, 섬의 땅 끝에 선 오름이다.      


올레길의 대미를 장식하는 땅 끝 오름 

제주도는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구마처럼 약간 길쭉하게 생겼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내려오는 민담에 서쪽 한경면 두모리는 섬의 머리이고, 동쪽 끝에 있는 지미오름은 꼬리로 여겼다고 한다. 한자로 풀이하면 지미(地尾), 이름 그대로 ‘땅 끝’이란 뜻이다. 오름 아래에는 농가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종달마을이 있다. ‘종달(終達)’ 역시 ‘맨 끝에 있는 땅’이란 의미다. 조선시대에 제주목사가 부임해 순시를 나설 때도 가장 마지막에 당도하는 고을이 종달리였다고 한다. 

중산간에 위치한 오름들과 달리 지미오름은 해안에 접해있어 표고(165.8m)와 비고(160m)의 차이가 크지 않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지만 지미오름이 품은 아름다움은 보통 이상이다. 종달리를 다녀간다면 지미오름은 무조건 올라야 하는 추천 코스 1순위다. 과거에는 오름 주변이 갯벌로 되어 있어 바닷물이 들고 나며 마치 섬처럼 보였다고 하는데 소금밭 간척사업 이후 지형이 바뀌면서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 바닷물이 차올랐을 당시에는 정말 땅 끝에 선 오름 같았을 것이다.  

올레꾼이나 도보 여행자들이 알음알음 찾던 지미오름은 이젠 제법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단정히 정비된 주차장 한쪽에 깔끔하게 관리되는 화장실 건물까지 있다. 해안이나 일주도로를 지날 때 무심코 바라만 보던 지미오름에 사람들 발걸음이 모이기 시작한 건 2012년도 올레길 21코스가 개장되면서 부터다. 올레길 말미에 지미오름 등정이 포함되어 예나 지금이나 많은 올레꾼들이 이곳을 지나간다. 섬을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이보다 안성맞춤인 곳이 또 있을까. 지미오름은 예능 프로그램인 <아빠! 어디가?>에 소개되기도 했다. 만능 MC인 김성주와 어린 아들이 함께 정상을 올랐는데 숨은 비경이 브라운관을 통해 펼쳐지면서 더욱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 꼬마가 장성해 멋진 청년이 되었을 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때 그 풍경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푸른 바다와 정겨운 마을의 조합은 옳다

지미오름은 시작부터 끝까지 오르막이라 한 번에 오르기 쉽지 않다. 한두 번 쉬어갈 마음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본다. 다행히 탐방로가 정비되어 있어 길이 험하진 않다. 소나무가 많이 자란 덕에 탐방길에 마른 솔잎이 깔려 푹신한 느낌마저 준다. 나뭇가지들이 터널을 이뤄 한낮의 따사로운 햇빛을 막아주니 한결 시원하고 청량한 기분이 되어 오를 수 있었다.  

비탈진 계단길을 오르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다. 정상까지 아직 먼 걸음이지만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나와 같은 이들이 많은 건지 탐방로 옆 빈터에 나무 의자들이 여럿 놓여 있다. 올라올 땐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앉고 보니 숲 사이로 종달리 마을과 푸른 바다가 나란하게 눈에 들어온다. 삐죽 솟은 나뭇가지에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마주보며 매달려 있다. 단지 몇 걸음 올라왔을 뿐인데 이렇게 어여쁜 풍경이 펼쳐지다니! 과연 정상에는 어떤 비경이 숨어 있을까. 갑자기 마음이 바빠져서 오래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숨을 헉헉 대며 길을 재촉하는 동안 몇 번을 뒤돌아봤는지 모르겠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풍경 덕에 정상까지 오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지미오름은 여러 번 쉬어가며 천천히 오른다면 30분 정도 소요된다. 물론 체력이 좋다면 20분 만에도 정상을 밟을 수 있다. 까마득하게 이어지던 계단이 끝이 나고 드디어 정상 입성.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눈이 시원할 정도로 탁 트인 기막힌 절경이 펼쳐진다. 멋진 광경 앞에선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같은 마음이 되는 것 같다. 이제 막 정상을 올라선 엄마와 꼬마 친구가 나란히 선 채 연신 감탄사를 터트린다. 

지미오름은 분화구 한 쪽이 무너져 내린 말굽형 형태여서 분화구 둘레를 도는 탐방로는 없다. 대신 정상에 위 아래로 나뉜 두 개의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어느 쪽이건 눈에 비친 모든 것들이 아름답기만 하다. 엷은 코발트빛으로 물든 바다에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석처럼 박혀 있고, 푸릇한 밭과 정다운 마을이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 정적인 풍경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해안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밖에 없다. 구름도, 바다 위에 뜬 배들도, 정갈하게 가꿔진 밭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도 모두 평온한 시간 속에 멈춰 있다. 고요한 풍경에 취해 있다 보면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간다.       


올레길과 둘레길, 모두 걸어볼까

전망대 사이에는 산불감시초소와 국토 측량 기준 자료가 되는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삼각점이 있는 곳은 옛 봉수대 터로 추측된다. 지미오름은 지미봉으로도 불리는데 이름 뒤에 봉(峰)이 붙은 곳엔 대부분 봉수대가 있었던 경우가 많다. 과거엔 높은 산에 봉수대를 설치해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했는데 제주에서는 오름들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옛 기록에 따르면 종달리 해안에 인접한 지미봉에도 봉수대가 있어 북서쪽으로 왕가봉수, 남동쪽으로 성산봉수와 교신했다고 한다. 섬을 지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봉수대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지금은 옅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 

봉수를 올렸던 그곳에서 후손들은 바다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날을 다짐한다. 지미오름은 다랑쉬오름과 더불어 동부에서 이름난 일출 명소이다. 특히 우도와 성산일출봉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은 특별한 해맞이를 선물한다. 계절에 따라 일출 포인트가가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감동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꿀맛 같은 아침잠을 포기하고 나선 발걸음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해준다.  

오름을 내려갈 때는 올레길 표식을 따라 반대쪽 길을 이용해도 된다. 경사가 좀 더 심한 구간도 있지만 올라왔던 탐방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올레길로 내려오면 오름 입구 반대편으로 도달하게 되는데 지미오름 둘레길과 이어져 있어 주차장까지 어렵지 않게 되돌아올 수 있다. 둘레길은 오른쪽 길이나 왼쪽 길 모두 입구까지 거리가 비슷해 마음 가는 대로  걸으면 된다. 약 20~30분 정도 걸린다. 오른쪽 길은 무너져 내린 분화구 안쪽에 형성된 숲길을 거쳐 가며 사람들이 별로 없어 호젓하게 사색하며 걷기 좋다. 무성한 나무 가지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멀리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무덤이 가득한 종달리 공동묘지도 볼 수 있다. 제주 사람들에게 오름은 삶을 영위하는 공간인 동시에 망자를 위한 안식처임을 말 없이 되새겨주고 있다.           


지미오름과 닮은 꼴인 말미오름 

종달리 마을을 사이에 두고 지미오름과 마주보고 있는 말미오름은 여러모로 닮은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이름에 담긴 뜻이 비슷하다. 말미오름 또한 땅 끝에 있어 말 미(尾)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밖에 오름 형태가 됫박 같다고 해 두산봉(斗山峰)이라 부르며, 혹자는 동물의 머리처럼 보인다고 해 머리 두(頭)자를 쓰기도 한다. 지미오름과 말미오름은 모두 올레길이 거쳐 가는데 지미오름이 올레길의 피날레를 장식한다면 1코스에 위치한 말미오름은 올레길을 열어나가는 오름이라 할 수 있다. 

말미오름은 종달리와 시흥리에 걸쳐 있는 이중식 화산체로 봉긋하게 솟은 여느 오름들과 달리 수십 미터에 걸쳐 절벽을 이루고 있다. 오름 안쪽은 완만한 구릉 지대로 소와 말을 방목해 키우는 터전이다. 때때로 오름을 걷다 마소 무리를 만나기도 하는데 천천히 길을 비켜주면 이들도 순순히 옆을 지나쳐간다. 말미오름은 비고가 101m 밖에 되지 않은 데다 가파르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오르는 수고보다 훨씬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탓에 오히려 미안할 정도이다. 약 10~15분 정도면 전망대에 닿는데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그림 같은 풍경에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가로 세로 반듯한 밭담과 알록달록한 집들 너머로 파랗게 펼쳐진 바다는 지미오름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내친 김에 말미오름과 이어진 알오름까지 다녀와 보자. 너른 들판을 품은 알오름은 시야에 가리는 것이 없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절경을 뽐낸다. 특히 따스한 봄날에도 흰 눈으로 뒤덮여 있는 한라산이 최고의 비경으로 꼽힌다.


주소 :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산3-1(지미오름) / 제주시 성산읍 시흥리 산1-5(말미오름)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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