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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4. 2023

오름의 여왕 앞에 서다

다랑쉬오름와 아끈다랑쉬오름

먼 옛적 달을 품었다는 거대한 굼부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의 상징처럼 보인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하나, 둘 잊혀져간 이야기들이 그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곳에 서면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들이 아름다운 파노라마를 펼친다. 제주 오름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동부 최고의 오름

제주 동부 구좌읍에 자리한 다랑쉬오름은 웅장한 산세와 온전히 보전된 분화구가 일품인 오름이다. 멀리서도 보이는 위용스러운 자태는 동부의 수많은 오름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며, 서부의 노꼬메오름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첫째, 둘째를 다툴 만큼 으뜸으로 꼽힌다. 동부에서 가장 높다 보니 이 일대를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도 담당한다. 대부분 오름이 비고 100m 안팎인 것을 감안할 때 다랑쉬오름은 무척 높은 편에 속한다. 섬을 통틀어도 비고가 200m 이상인 오름은 다랑쉬오름을 포함해 어승생, 큰바리메오름, 노꼬메오름, 군산오름 등 다섯 개에 불과하다. 

산체가 높은 만큼 탁 트인 시야는 다랑쉬오름을 올라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정상에 오르면 올록볼록한 오름 군락과 너른 들녘,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룬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누구라도 감탄해 마지 않는 자연의 작품은 그 어떤 예술품보다 감동적이다. 새해 첫 날이면 일출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인파가 북적인다. 이토록 수려한 경관을 품은 다랑쉬오름 앞에 ‘오름의 여왕’, ‘오름의 랜드마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라산과 오름바다가 그려내는 황홀함

고개를 한껏 들고 올려다보아도 오름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 번 크게 심호흡 한 후 탐방로에 발을 내딛었다. 비탈진 경사면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진 탐방로는 체력과 끈기만 있다면 아이들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다. 가파른 길이지만 시간을 넉넉히 두고 오르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닿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때는 잠시 멈춰선 후 고개를 돌려보자. 한발씩 내딛을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이 기운을 북돋워준다. 마지막 걸음을 뗄 무렵엔 아끈다랑쉬오름의 분화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정상에 서면 수많은 오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용눈이오름을 비롯해 멀리 안돌과 밧돌오름, 높은오름, 백약이오름 등 일일이 다 세기도 힘들 정도다. 그 너머로 햇살을 듬뿍 머금은 바다가 금빛 쟁반처럼 반짝인다. 성산일출봉과 우도 전망까지 더하면 통쾌하다 싶을 만큼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다. 복잡한 머릿속도 답답한 마음도 쏴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모두 날아가 버린다. 흘러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한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평화로운 정경이다.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리면 섬의 기둥인 한라산이 나타난다. 한라산은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값지게 다가온다. 한라산 자락 아래 산그림자가 겹겹이 겹쳐 보이는 오름들이 유난히 신비롭다. 해질녘에 한라산을 바라보며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노을이 번져가는 하늘 아래 실루엣만 남은 한라산은 황홀하리만치 매혹적이다. 

     

백록담과 닮은 분화구그리고 신화와 역사

오름 중앙부에는 귀한 보석이 숨어 있다. 원형이 그대로 남은 움푹 파인 분화구는 오로지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진귀한 선물이다. 둘레가 1.5km에 달하는 분화구의 능선을 따라 도는 데만 30분 가량 걸린다. 다랑쉬오름 분화구는 종종 한라산의 백록담에 비견되는데 신기하게도 실제 깊이마저 115m로 백록담과 같다고 한다. 다만 백록담과 달리 이곳 분화구는 투수성이 높아 물이 고이지는 않는다. 

능선 중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산불감시초소는 분화구를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깊고 푸른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신화가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 제주도를 만든 여신인 설문대할망이 치마에 흙을 채워 나르는 길에 한줌씩 놓아 오름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너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있어 주먹으로 한 번 쳤더니 꼭대기가 푹 들어가 버렸단다. 그것이 바로 지금 서 있는 다랑쉬오름이다. 설문대할망이 주먹으로 친 곳이 분화구인 셈이다. 분화구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과거엔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고 해서 월랑봉(月郞峰)으로 불렸었다. 그런 까닭에 추석 보름날에는 세화리 주민들이 이곳에서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든 지금도 분화구에는 밤마다 신비로운 달빛이 비쳐든다.  

들녘 가운데 우뚝 선 듬직한 오름은 제주4.3사건의 아픔까지 묵묵히 껴안고 있다. 광복 이후까지도 오름 아래쪽에 다랑쉬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4.3때 모두 불에 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잊혀져가는 역사였던 4.3사건이 재조명되면서 근처의 다랑쉬굴에서 당시 피란했던 사람들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다. 언제나 깨닫는 것이지만 제주 곳곳에 4.3의 아픔을 담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  


겨울날의 서정을 품은 아끈다랑쉬오름  

다랑쉬오름과 나란히 있는 아끈다랑쉬오름은 마치 형과 아우를 떠올리게 한다. 높낮이만 다를 뿐 오름 중앙에 원형 굼부리가 있는 것과 그 둘레로 탐방길이 난 것까지 둘이 꼭 닮았다. 아끈은 제주어로 ‘작은’, ‘새끼’란 뜻을 갖고 있는데 풀이하자면 다랑쉬오름의 동생격이 되는 셈이다. 

오름이 낮다고 볼 만한 풍경이 없는 게 아니다. 누군가 ‘오름은 올라야 제 맛’이라고 했는데 아끈다랑쉬오름이야 말로 그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 오르지 않으면 아끈다랑쉬오름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오름이 나지막해도 경사면을 직선으로 올라야 하는 까닭에 5분 정도는 애를 써야 한다. 정상에 펼쳐진 풍경은 기대 이상이다. 특히 가을이 백미다. 마치 보란 듯이 굼부리 안팎을 가득 메운 억새꽃 무리가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능선을 따라 난 오솔길은 억새와 나란히 걷는 길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들이 사락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분화구 가장자리에 서면 겨울에도 생명력 넘치는 밭들이 내려다보인다. 하늘 아래 펼쳐진 억새밭은 햇살이 비치는 곳마다 노르스름하게 빛난다. 곁에 다랑쉬오름이 지키고 있어 더 든든해 보인다. 아끈다랑쉬오름에서 보낸 한 때는 포근함과 평화로움이 흐르는 겨울날의 서정으로 남는다.      


주소 :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산6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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