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작가 정은주 Mar 31. 2023

벚꽃비 흩날리는 날의 오름 산책

사라봉과 별도봉

배를 타고 제주에 다다르면 닮은 듯 다른 듯 사라봉과 별도봉이 나란히 입도객들을 맞는다. 바닷가 절벽을 나누어 품고 있는 것이 마치 형제처럼 우애가 두텁게 느껴진다. 벚꽃이 활짝 핀 4월의 봄날, 여행자의 옷을 벗고 주민들과 더불어 자박자박 산책에 나섰다.     

  

도심 속 공원 사라봉

제주 구도심에 위치한 사라봉은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근에 국립제주박물관과 우당도서관, 제주시 평생 학습센터 등 여러 시설이 자리한 도심 공원이다. 산간에 있는 오름들이 나 홀로 호젓하게 즐기는 곳이라면 사라봉은 시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자 운동 장소로 늘 사람들이 오간다. 오름 입구까지 진입로가 말끔히 포장되어 걷기 편한 데다 주차 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커다란 야자나무들이 줄 지어선 길은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맑은 목탁 소리가 들려와 따라가 보니 보림사란 이름의 작은 사찰에 걸음이 멈췄다. 사라봉 기슭 아래 자리한 보림사는 1957년 창건된 근래 세워진 절이다. 솔숲을 배경처럼 둘러 깊은 숲에 있는 느낌이다. 보림사는 순천 선암사에서 기증받은 목조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조선 시대 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제주도 유형 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대웅전 단청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형상이 눈길을 끈다. 단청과 기둥에는 금박을 입혀 소박하지만 화려한 면모가 엿보인다. 절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길목에 멀리 제주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정상에 세워진 봉수대와 동굴 진지

진입로 끝에 다다르면 사라봉과 별도봉 가는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어느 한쪽만 골라 올라도 좋고, 두 오름을 모두 다녀와도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음수대가 있는 왼쪽 길을 오르면 사라봉 정상으로 이어진다. 사라봉은 높이가 약 148m 정도로 경사진 언덕을 지그재그로 오르는 데다 길이 잘 닦여 있어 크게 어렵지 않다. 몇 번 가쁜 숨을 몰아쉬고 나니 어느새 정상이다. 

정상에는 과거에 쓰였던 봉수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현무암을 쌓아 올린 단단한 봉수대가 여전히 건재해 보인다. 봉수대 앞에는 수풀로 가려진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이 전쟁을 준비하며 뚫어 놓은 동굴 진지다. 사라봉뿐 아니라 제주도에는 곳곳에 이러한 동굴 진지가 수없이 많다. 평화의 섬 제주도에도 전쟁이 할퀴고 간 상흔이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봉수대 옆에 세워진 팔각 정자는 보기보다 더 근사한 전망을 품고 있다. 정자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방을 훑어보니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하늘과 새파란 바다가 살랑거리는 마음에 콕 와 박힌다. 예전엔 나무들이 무성해 시가지 전경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봄맞이 전정 작업을 했는지 제주 시내도 훤하게 내다보인다. 옛 시절에는 제주 성내가 내려다보였을 터이다. 여기에 붉은 태양이 더해지면 수많은 선비와 묵객들이 찬탄해 마지않았던 절경이 펼쳐진다.


붉은 비단을 두른 푸른 봉우리

사라봉은 예로부터 지는 해가 아름답기로 이름난 명소다. 많은 이들이 사라봉에 올라 감흥을 나누며 시와 노래를 읊었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제주의 대표적인 문인인 매계(梅溪) 이한진 선생은 ‘사봉낙조(紗峰落照)’란 시를 지었는데 이곳에 몇 구절 옮겨본다. 




                                           누가 붉은 비단을 푸른 봉우리에 둘렀는고

                                           지는 해 삽시에 온갖 모습 만들어 내었네 

                                           신기루처럼 변하는 자태 누런 학이 나는 듯 

                                           고래굴에 뜬 빚은 붉은 용을 희롱하는 듯

                                                                                     … 

                                            잠깐 해 수레 멈추고 송별 자리 함께 하여

                                            해 돋는 새벽길에 다시 만나길 기약하세



바다 아래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이토록 평화로울까. 일몰 후 어둠이 깔리면 탐방로를 따라 하나 둘 가로등이 길을 밝힌다.    


별도봉이 품은 세계적인 가치 

별도봉의 옛 이름은 베리오름이다. ‘베리’는 제주에선 바닷가 낭떠러지를 가리킨다. 해안 절벽에 난 길을 걷다 보면 왜 베리오름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사라봉과 맞닿아 있는 별도봉은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인 제주 칠머리당 영등 굿터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오름이다. 영등굿은 제주도에서 중요한 제례의식 가운데 하나로 매년 음력 2월 경이면 마을마다 한 해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 펼쳐진다. 별도봉에서 벌어지는 영등굿이 가장 대표적이며 보림사 맞은편에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전수관이 있다. 


세 개의 신석이 모셔진 굿터를 지나면 푸른 바다가 품 안에 안기며 마음을 시원하게 적신다. 바닷가 절벽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는 길, 먼바다 쪽으로 뻗어 난 방파제가 활주로 마냥 길게 이어져 있다. 거대한 여객선과 화물선들이 분주히 오가는 풍경에 떠나온 마음이 또다시 설렌다.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부추기는 욕심쟁이 마음 같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길을 걷다

절벽을 돌아 넘어가는 곳에는 애기 업은 돌이 서 있다.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이가 이런 이름을 붙였나보다. 보면 볼수록 마음이 애잔해지는 자연의 작품이다. 별도봉 탐방로에는 갖가지 사연과 이름이 붙은 바위들이 여럿 있다. 심지어 ‘자살바위’라는 이름을 가진 곳도 있다. 옛적에 한 젊은이가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긍정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별도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별도봉은 제주 시내에 숨은 벚꽃 명소이기도 하다. 봄날의 햇살이 따사로이 비치는 언덕에 연분홍빛 꽃송이를 매단 벚나무가 가득 줄지어 있다. 살랑대는 봄바람을 따라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릴 때마다 콩닥콩닥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화창한 봄날, 저 멀리 한라산이 구름 모자를 쓴 산 할아버지처럼 서 있고 건너편에 사라봉이 푸른빛을 뽐내며 눈인사를 보낸다. 뜻밖의 꽃놀이에 신이 난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 아래 모두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TIP. 산지등대와 카페 물결

제주항이 내려다보이는 사라봉 기슭에는 100년 넘는 역사를 간직한 산지등대가 있다. 1916년에 처음 불을 밝힌 등대는 지금까지 밤바다를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다. 새하얀 등탑에 오르면 푸른 바다와 북적이는 제주항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등대 안에는 옛 관사 건물을 개조한 카페 물결이 있다.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지향하는 친환경 카페로 일회용 컵을 쓰지 않으며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과 독립 출판물, 친환경 소품들을 전시 판매한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이전 02화 섬의 시작과 끝에 마주한 닮은 꼴 오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