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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18. 2023

하늘 아래 고요한 산정 습지

물영아리오름

멀리 까마귀 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첩첩산정’에 하늘 물을 담은 못이 숨어 있다. 물의 수호신이 산다는 전설설이 내려오는 물영아리오름. 하늘 높이 뻗어난 삼나무 길을 따라 천상의 못을 찾아 나섰다.      


세계적인 보존 가치를 지닌 습지

한라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물영아리오름은 남원읍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방문자센터를 비롯해 주차장과 화장실 등 탐방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누구나 쉽게 오름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서귀포시와 제주시를 연결하는 남조로 도로 변에 있어 찾아가기도 쉽다. 

물영아리오름이 신비로운 건 여느 오름들과 달리 정상부에 푸른 기운이 가득한 습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둘레 약 300m, 깊이 40m 가량의 분화구가 원형을 유지한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사시사철 물이 고인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오로지 하늘에서 내린 빗물과 안개수를 담고 있는 천연 습지이다. 물이 찰랑거리는 습지는 맑은 날엔 고요한 산정 호수처럼 보인다.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에는 작은 백록담과 같은 화구호가 되기도 한다. 흐린 날엔 또 다른 분위기이다. 습지 주변에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면 신들이 살던 세계로 빨려들 것 같은 오묘한 기운에 사로잡히게 된다. 

산정 습지에는 멸종 위기종 2급인 물장군을 비롯해 제주 도롱뇽, 북방산 개구리, 맹꽁이, 노루, 누룩뱀, 오소리 등 여러 곤충과 양서류, 파충류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 뿐일까. 물여뀌와 같은 수많은 식물들이 작은 습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다양한 생물종의 보금자리인 물영아리오름은 국내에서 가장 처음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인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에는 우리나라에서 5번째 람사르 습지로 이름을 올렸다. 제주에는 물영아리오름을 포함해 물장오리오름, 1100고지 습지, 동백동산, 숨은물벵듸습지 5곳의 람사르 습지가 있다.      


늑대소년이 뛰어 놀던 들판

초지 너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오름이 우뚝 솟아 있다. 들판에는 여기저기 풀을 뜯고 있는 소들 천지다.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소도 있고, 우람한 어미 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귀여운 송아지도 보인다. 목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때가 되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들판을 빠져나가는 것이 영특하다. 뒤처지는 소들이 없는지 앞선 소가 연신 뒤를 확인하며 긴 울음소리로 걸음을 독촉한다. 사람들을 보아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제 갈길 가기 바쁜 소들에게 탐방객들은 그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객일 뿐이다. 

오름 아래 펼쳐진 너른 들판은 영화 <늑대소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소들이 지나간 자리에 순이와 늑대소년이 동네 꼬마들과 들판을 누비며 축구를 하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해맑게 웃던 아이들의 순수함을 누가 앗아갔을까. 늑대소년의 슬픈 운명을 따라가는 동안 마음이 아련했던 기억이 떠올라 쉬이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탐방길

기찻길처럼 침목이 이어진 길 끝에 편백나무가 늘어선 오솔길이 나타난다. 지저귀는 새 소리와 함께 향긋한 편백향을 맡으며 자박자박 걷기 좋다. 5~10분 가량 편백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끝없이 이어진 계단길이 보인다. 본격적인 오름 탐방의 시작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나뭇가지에 가려진 계단길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계단이 꽤나 가파르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녹록치 않다. 바짝 집중해서 오르면 20분 정도 걸리지만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한 두 번은 쉬었다 가야 할 만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다행히 중간에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힘이 부칠 때마다 잠깐씩 쉬어갈 수 있다. 쉼터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울창한 숲의 정취를 내려다 보면 그간의 노고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상쾌한 기운만 남는다. 물영아리오름을 테마로 한 시화도 전시되어 있다. 


그게 뭐 / 큰일이라고 / 벽 앞에서 울었을까 / 물영아리 천 여 계단 / 오르고야 알았다 / 벼랑길 / 한 두 번이야 / 누구나 만나는 것을 …(중략) 


김영숙 작가의 ‘우아한 비행’을 곱씹어보며 남은 계단을 올랐다.   

  

물영아리오름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

끝날 것 같지 않던 계단도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드디어 마지막 칸에 닿았다. 습지로 향하는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다. 키 작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이 계속되다 어느 순간 시야가 트이며 푸른 습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아!’ 갑작스러운 반전에 자신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움푹 파인 분화구 안에 물이 찰박찰박 차오른 습지는 수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더욱 신비롭다. 분화구 벽면까지 초목들이 가득 메우고 있어 온통 초록빛 세상이다. 습지 가장자리에 나무 데크로 만든 탐방로가 정비되어 있어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볼 수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분화구 형태에 따라 하늘도 둥글게 보인다. 그 아래에 둥글게 이어진 아름다운 습지가 있다.

습지는 고요함 그 자체이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새 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유일한 소리다. 탐방로를 걷는 걸음마저 절로 조용해진다. 습지 안에선 휴대폰조차 허용되지 않는 속세와의 완벽한 단절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늘 정적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초여름부터 장마 기간에는 시끌시끌한 소음에 귀를 막게 된다. 산란 시기에 접어든 맹꽁이들이 일제히 노래를 부르며 대합창을 이루기 때문이다. 습지가 떠나가라 울어대는 맹꽁이 울음소리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크고 우렁차다. 소리만 들어선 족히 수 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사람들이 오가는 기척에도 아랑곳없이 대차게 울어대는 맹꽁이들이지만 백로 한 마리가 날아들자 순식간에 울음소리가 뚝 그친다. 백로의 가녀린 다리가 휘적휘적 습지를 누비는 동안 맹꽁이들은 입도 뻥긋 하지 않는다. 생태계의 피라미드가 생생한 라이브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맹꽁이와 백로의 밀당이 계속되는 동안 작은 노루 한 마리가 물가로 내려와 조용히 풀을 뜯는다. 신이 난건 탐방객들이다. 몇 걸음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야생 노루를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운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노루를 찍느라 바빠진다. 인기척을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는 몸통이 길고 가느다란 도마뱀과 마주쳤다. 한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저만치 쪼르르 달려 나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 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도마뱀과 숨바꼭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름을 내려가는 두 가지 방법

습지를 나선 후 오름을 내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정상에서 갈라진 두 길 중 하나는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망대 코스를 거쳐 산길을 내려가는 것이다. 힘들게 정상을 올라왔는데 기왕지사 전망대까지 가보기로 한다. 전망대로 이어진 좁은 오솔길이 걷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습지에서 전망대까지는 5~10분 남짓 걸린다.

전망대에 오르면 나무들에 가려져있던 주변 풍경이 시원스레 눈에 담긴다. 그냥 지나쳤다면 서운했을지 모를 근사한 전경이다. 오름 군락이 펼쳐낸 파노라마를 바라보며 제주가 오름의 왕국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삼나무 숲 사이를 내려오면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중잣성이 눈에 들어온다. 잣성은 조선시대에 제주 중산간 지역에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역사적인 유물로 지대에 따라 하잣성, 중잣성, 상잣성으로 나뉜다. 물영아리오름에는 목장의 경계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중잣성이 여전히 견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초지가 보이기 시작하면 오름 탐방도 막바지에 접어든다. 누런 소들이 길게 울어대는 것이 다시 만나 반갑다는 인사처럼 들린다. 


주소 :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산182-7      


TIP. 

이름마저 어여쁜 물보라길 

물영아리오름은 옛적 물보라오름이라 불렸다고 한다. 오름 둘레로 옛 이름을 딴 가벼운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오름 입구에서 습지로 곧장 올라가는 길과 오름 뒤쪽으로 에둘러 올라가는 물보라길이 갈라진다. 시골길 정취가 묻어나는 물보라길은 전망대까지 이어지며 중간에 목초 지대를 지나는 즐거움이 숨어 있다. 바람을 타고 짙푸른 물결이 일렁대는 서정적인 풍경에 취할 수 있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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