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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16. 2023

반짝이는 시절을 추억하며 걷는 길

추억의 숲길

한라산 자락과 맞닿아 있는 추억의 숲길은 선조들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따라 걷는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숲속을 걷다 보면 마음에 새겨 놓은 기억이나 추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추억의 숲길이라니. 누가 이리도 어여쁜 이름을 지었을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이 있다면 추억이라 불리는 삶의 조각일 것이다. 추억의 숲길은 한라산을 배경처럼 두른 서귀포 산간 지역에 펼쳐져 있다. 해발 450~800m 지역에 이어진 숲길은 옛적 선조들이 삶의 터전을 가꾸고 살아왔던 곳이다. 지금은 집터나 목축지, 통시 등이 미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선조들이 오가던 옛길을 보존하고 역사 문화 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2년에 이 숲길이 만들어졌다.     


비밀스러운 입구를 지나 숲 속으로 

추억의 숲길은 차들이 오가는 산록도로에서 바로 이어진다. 이정표가 있기는 하나 자칫하면 그대로 지나칠 수 있어 근방에 접어들면 천천히 지나며 주위를 살펴야 한다. 따로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통행에 피해가 가지 않게 갓길에 세워두면 된다. 

숲길 입구는 누군가 숨겨 놓은 비밀 공간처럼 보인다. 나무들이 빈틈없이 우거져 있는 한 귀퉁이에 ‘추억의 숲길’이라 쓰인 글귀 아래로 사람들이 나오고 들어간다. 입구를 지나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일상을 넘어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 기분마저 새로워진다.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쉼터가 나타난다. 주민들이 쓴 싯구가 곳곳에 걸려 있어 한 구절씩 음미하며 가볍게 몸을 풀어 본다. 노약자들을 위한 나무 지팡이도 준비되어 있는데 숲길 중에 걷기 다소 험한 구간도 있어 꽤나 유용하다. 이용한 후엔 다시 이곳에 놓고 가면 된다. 


야자매트가 깔린 오솔길이 추억의 숲길이란 이름처럼 정겹게 보인다. 빼빼하고 키 작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겨울딸기 군락도 볼 수 있는데 땅에 붙어서 자라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 앉는 수밖에 없다. 여름에 꽃을 피우고 가을, 겨울에 결실을 맺는 겨울딸기는 여기에 삶터를 일군 사람들에게 중요한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한겨울 추위를 견뎌낸 딸기 맛이 궁금했지만 새와 동물들이 모두 먹고 난 뒤여서인지 남은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연자골

야자매트가 깔린 구간은 전체 숲길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약 30분 정도 가다 보면 옛 집터에 닿는데 어린아이들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여기선 제주의 옛 집과 생활 문화, 풍속을 엿볼 수 있다.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덮어버릴 정도로 무성한 숲 속에 오래전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연자골이라 불리던 산골 마을에 4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으며 화전과 목축, 사냥을 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돌무더기가 가득한 집터에는 이들의 고단했던 삶이 녹아있다. 비록 터만 남아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지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척박한 환경을 헤쳐 나가며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련해진다. 

통시는 제주의 옛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거 문화로 변소와 돼지막을 한 공간에 배치한 독특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뒷마당 같은 잘 보이지 않는 야외에 두었으며 마당보다 깊게 바닥을 판 뒤 두 세단 정도 높게 긴 돌을 놓아 변소를 만들었다. 통시에는 따로 지붕을 두지 않는데 문득 반짝이는 별빛 아래서 볼일을 보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이외에도 말방아와 밭담 등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리저리 기웃거리게 된다.

연자골은 1948년에 제주 4.3 사건 이후 사라져 버렸다. 당시 산간 마을 사람들은 토벌대를 피해 모두 해안 쪽에 있는 아랫마을로 피신을 갔는데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떠나버리고 난 뒤 폐허가 된 연자골은 돌담들만 지키는 추억 속의 마을로 남았다.      


숲 속 등대 같은 사농바치 터

마을 터를 지나면 나무뿌리가 뒤엉킨 돌멩이 투성이 길이 계속된다. 경사가 완만한 까닭에 헉헉대며 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발걸음이 편하려면 밑창이 단단한 트레킹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추억의 숲길은 온전히 완주하려면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가벼운 산행을 나선다는 마음으로 준비하면 된다. 

걸음을 뗄 때마다 숲은 점점 울창해진다. 도로에서 불과 30~40분 정도 걸어 왔을 뿐인데 어느새 깊은 산중이다. 처음 봤던 키 작은 나무들은 사라지고 아름드리 삼나무들로 바뀌어 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나무 둥치마다 이끼들이 두껍게 뒤덮고 있어 마치 태곳적 원시림을 연상케 한다. 

숲길과 이어진 계곡은 물이 흐르지 않아 바윗길을 이룬다. 암반이 갈라져 틈을 이룬 곳마다 작은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는데 물에 비친 반영이 신비해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아득히 먼 옛적에 용암이 흘러갔던 길을 두 발로 굳건히 서서 한 발 한 발 올라본다. 검은 실루엣을 남기며 멀어져 가는 바위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기억의 창고 속에 살며시 자리를 잡는다. 

계곡을 벗어나 조금 더 올라가면 사농바치(사냥꾼) 터가 나타난다. 세월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형되었지만 이곳에 남은 터는 앞이 트인 둥근 형태로 돌담을 쌓아 올렸다. 사람이 두서넛이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공간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 숲에선 이만한 피난처가 없다. 몸을 피할 곳을 찾아 헤매던 사농바치들에게는 구명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얼기설기 아무렇게나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강한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모양과 크기가 다른 돌들을 차례차례 얹어 가면 쌓은 지혜가 엿보인다.       


편백나무 숲에서 추억에 잠기다

사농바치 터를 지나면 추억의 숲길은 한라산 둘레길과 겹쳐진다. 무오 법정사에서 출발한 한라산 둘레길은 편백나무 숲을 거쳐 돈내코까지 이어진다. 추억의 숲길은 편백나무 숲까지 다녀온 뒤 온 길을 되짚어가며 다시 돌아오면 된다. 편백나무 숲에 닿으면 두 갈래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한데 섞여 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쉼 없이 걸어온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맑고 청량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껴보자. 바람에 실려 온 향긋한 편백 향이 마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이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만끽하다 보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말끔히 정리된다. 숲에서는 건강해지는 비결이 따로 없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도 가져보자. 눈높이에만 맞춰져 있던 풍경들이 시야가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몸이 노곤해지며 옛 추억에 잠겨 꿈결을 헤매고 있을 때,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린 이파리가 이마에 닿았다. 이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 했다.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으로 올랐던 길을 따라 내려오는 뒤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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