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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19. 2023

오묘하고 신비로운 그 날의 숲길

머체왓숲길

초원을 지나 깊은 계곡을 따라 들어간 곳에 미지의 숲길이 이어져 있었다. 돌투성이 지대에서도 나무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울창한 숲을 이뤘고,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이 이내 설렘으로 바뀐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 마법의 숲처럼 신비로운 머체왓숲길을 걸었다.     

한라산 남쪽 자락에 형성된 머체왓숲길은 일 년 내내 녹음이 우거진 울창함을 자랑한다. 머체왓은 제주어로 머체(돌무더기)와 왓(밭)을 합친 말인데 이름에 담긴 뜻이 무색할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하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다. 소롱콧길, 머체왓숲길, 서중천탐방로 총 3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소롱콧길을 다녀왔다. 소롱콧은 한남리 서중천과 작은 하천 사이에 형성된 숲이다. 작은 용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전체 길이가 6km가 넘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두고 출발하기를 권한다. 보통 걸음으로 약 2시간30분 정도 소요된다. 


작은 용을 타고 누비는 소롱콧길 

숲길 출입문을 통과해 초원 같은 목장 지대를 지나는 도중에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말 무리를 만났다. 풀을 뜯고 있는 어미 말 옆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망아지가 눈에 들어왔다. 요란한 풀벌레 소리도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 귀여워 나무 그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다 일행이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울창한 숲길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된다. 탐방로에 깔린 야자매트를 따라 사람의 손길이라곤 거의 닿은 적 없어 보이는 천연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끼가 두텁게 덮인 바위와 그 틈을 뚫고 자라난 우람한 나무들, 기이한 형태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 신비로운 분위기에 빠져 정신없이 걷다 보면 여기저기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길이 채이기 일쑤다. 머체왓숲길은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나무뿌리가 드러난 곳이 많아 잠깐 한 눈을 팔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웅덩이가 나타났다. 웅덩이를 감싸 안은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용을 연상시킨다. 소롱콧길이란 이름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여기에 얽힌 전설이 흥미롭다. 옛적 이곳에 형제 용이 살았는데 형은 듣는 것을 좋아하고 동생은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늘 대화가 끊이지 않았는데 하루는 한라산이 폭발한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 그대로 용암에 뒤덮여 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왠지 그들은 돌 안에 갇혀서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과연 내 곁에는 이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밤 새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용을 닮은 바위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치유의 기운이 가득한 편백나무숲을 지나

탐방로를 가로질러 난 임도를 건너면 순식간에 풍경이 바뀐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난 편백나무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발길을 이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야자매트는 숲길을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에 충실하다. 숲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면 야자매트만 따라 걸으면 된다. 

햇볕이 따갑게 느껴지는 날이지만 편백나무 숲은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풍성하게 잎을 매단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뒤덮어 숲 전체가 그늘진 덕이다. 새 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감에 시간이 멈춘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든다. 머체왓숲길은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촬영지 가운데 하나이다. 어린 아신이 생사초를 처음 발견했던 폐사군의 숲과 성인이 된 아신(전지현 분)이 화살 하나로 멧돼지를 잡았던 강렬한 첫 씬이 여기 편백숲에서 촬영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으스스한 장소로 등장했지만 실제는 신비로운 느낌이 숲 전체를 감싸고 있다.  

쉬어도 갈 겸 반듯하게 앉아 숲에 흐르는 피톤치드를 깊숙이 들이 마셔본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항균 물질인 피톤치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덕분에 잠깐의 휴식에도 몸이 개운해지고 머리가 맑아진 듯하다.

 

서중천 계곡을 따라 걷고또 걷고

편백나무가 이어지는 동안 숲은 더 깊어져간다. 나무뿌리가 계단처럼 얽힌 언덕을 지나고 중잣성을 따라 걷는 사이 어느새 중간 지점에 다다랐다. 하늘이 트여 있는 공터에 원형 또는 원뿔 형태로 쌓인 방사탑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마저 둥글게 보인다. 

이곳을 기점으로 탐방로는 이제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숲 속에서 나침반 없이 정확한 방위를 찾는다는 건 전문가라도 무척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숲길은 곳곳에 안내 표지가 잘 되어 있어 굳이 방위를 찾을 필요가 없지만 만약의 경우 서중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된다. 제주에서 긴 하천 가운데 하나인 서중천은 남원읍을 거쳐 태흥리 바다까지 흘러간다. 

낮은 관목나무 사이를 지나는 길은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 통로 같다. 바닥은 이끼와 낙엽들로 뒤덮여 있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살랑대며 잎사귀를 흔들어댄다. 앞서 가던 일행이 나무 사이에 가려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울창한 숲 속을 정신없이 헤집고 가다 잠시 계곡가 샛길로 들어섰다. 독특하게도 계곡을 가득 메운 건 맑은 물이 아니라 거대한 암반들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태곳적 원시 자연으로 돌아간 듯 했다. 거인들이 힘 자랑을 하려고 바위들을 내던지기라도 한걸까. 이리저리 쪼개지거나 커다랗게 덩어리진 채 기묘한 형태로 놓인 바위들이 작가의 손길이 닿은 예술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주도는 비가 와야 물길이 생기는 마른 계곡이 대부분인데 서중천 계곡은 군데군데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어 한층 오묘한 느낌이다.  

다시 임도를 건너 내려가면 녹음이 우거진 좁은 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약 500m 남짓한 서중천 숲터널은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걷기 좋다. 근사한 숲길을 혼자 독차지 하며 내려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박자박 걷는 발걸음마다 즐거움이 넘쳐난다. 걷기, 쉬기, 사색에 잠기기, 멍하니 바라보기, 콧노래 흥얼거리기... 머체왓숲길에서 몇 시간 만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혼자 걸어도, 함께 걸어도 좋은 마법의 숲.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이 숲 속을 걷고 있을 것 같다.


주소 :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문의 : 064-805-3113

*매주 월요일 휴장함

   

TIP.

족욕과 약차가 있는 카페 머체왓

숲을 탐방한 후에는 족욕과 차 한 잔으로 피로를 풀어보자. 숲길 입구에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카페 머체왓이 있다. 따끈한 물에 천연 족욕제를 넣고 발을 담그자 금세 피로가 가신다. 여기에 약차나 효소차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숲에서 캐온 약초들을 섞어 만든 차는 건강한 맛이다. 머체왓숲에는 꾸지뽕나무를 비롯해 황칠나무, 감초, 계피 등 약재로 쓰이는 나무와 풀이 많이 자란다. 유리창 너머 숲 풍경을 감상하며 아늑한 공간에서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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