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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0. 2023

원시림에 깃든 생명의 물

동백동산

선흘리 곶자왈 지대에 형성된 동백동산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숲 가운데 하나다. 언제 찾아도 푸른 이곳엔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숲속 깊은 곳에 닿으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생명의 못을 만나게 된다.   


제주도 네 번째 람사르 습지 

오래 전부터 동백동산은 선흘리 마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어왔다. 화전조차 일구기 어려운 돌투성이 숲이었지만 사람들은 나무를 구워 숯을 만들고 썩은 고목에 버섯을 재배하며 삶을 꾸려 왔다. 지금은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이야기들이지만 아직도 숲엔 숯 가마터와 같은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아낌없이 주었던 숲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은 이제 숲 지킴이가 되어 동백동산을 가꾸고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숲에는 크고 작은 습지들이 많다. 동백동산이 생명의 숲이라 불리는 이유다. 지금은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제주도는 우물조차 찾기 어려웠을 만큼 물이 귀했었다. 물 한 모금이 소중한 시절, 사람들은 숲속 습지를 찾아 말과 소에게 물을 먹이고 집집마다 필요한 생활 용수를 길어다 써야 했다. 매일 같이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울퉁불퉁한 숲길을 오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습지는 생명수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동백동산 습지는 생태적인 가치도 높아 2011년 제주도에서 4번째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제주에는 물영아리오름과 물장오리오름, 1100고지 습지를 비롯해 동백동산, 숨은물벵뒤 습지까지 총 5곳이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람사르 습지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아니어도 동백동산은 한 번쯤 가 볼 만한 곳이다. 제주도 숲 특유의 울창함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일 년 내내 푸른 비밀의 공간 

동백동산 습지센터는 숲에 관한 설명과 안내 자료들이 많아 먼저 들러보면 탐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탐방로는 5km 남짓하며 출도착이 같은 원형 코스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걷는 다면 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다. 동백동산 입구는 마치 비밀의 숲으로 통하는 문처럼 보인다. 그 문턱을 넘으면 순식간에 깊은 숲에 빠져든다. 

숲에선 계절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더구나 낙엽이 가을의 산물이라는 공식은 여기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 바닥에 깔린 낙엽을 볼 때는 가을인가 싶다가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부신 초록빛 향연이 펼쳐져 도저히 계절을 헤아릴 수 없다. 사계절 내내 잎을 피워내는 상록수들은 한겨울에도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낸다. 동백동산 앞에 붙여진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평지에 펼쳐진 난대상록수림’이란 문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보통 나무들은 가을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채로 겨울을 보낸 후 봄에 새 잎을 틔우지만, 사계절 온도가 일정한 곶자왈에선 나무들이 겨울이 되어도 잎을 떨구지 않는다. 결국 봄이 되어 새 잎이 헌 잎을 밀어내면 그제야 떨궈진 잎들이 낙엽처럼 바닥에 깔려 계절이 뒤섞인 오묘한 풍경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봄에 떨어진 수북히 쌓인 낙엽 사이를 지나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어느 계절을 걷고 있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해온 숲

얼마 걷지 않았는데 도틀굴이란 이정표가 나타났다. 4.3이라는 섬을 할퀴고 간 깊은 상처가 동백동산까지 파고든 흔적이다. 제주4.3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이곳 도틀굴까지 숨어 들었다. 굴 입구가 막혀 있어 들어가 볼 순 없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좁고 캄캄해 도저히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당시 도틀굴은 토벌대에게 발각되었고 많은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마을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잠시 눈을 감고 묵념을 올렸다.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을 지나자 둘 셋이 함께 손잡고 가도 좋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키 큰 상록수와 낮은 관목들이 경쟁하듯 자라난 주위에 고사리와 같은 양치류가 두터운 융단처럼 깔려 있다. 여전히 하늘은 초록빛이고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건재함을 과시한다. 볼수록 감탄스러운 경이로운 자연이다.

상돌언덕은 동백동산에 형성된 용암언덕 중 가장 큰 곳이다.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 이리저리 뒤엉킨 덩굴과 오래된 이끼들이 태곳적 신들을 모시던 제단을 연상시킨다. 괜히 마음이 엄숙하고 경건해진다. 예전엔 언덕에 오르면 멀리 함덕 바다까지 보였다지만 나무들이 워낙 울창하게 자란 바람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푸른 숲의 바다뿐이다. 

숯 가마터란 이정표를 따라 잠시 샛길로 접어든다. 검은 현무암 무더기가 잔뜩 널려 있는 곳에서 상상의 나래가 저절로 펼쳐졌다. 저기 서 있던 커다란 나무를 도끼로 넘어뜨렸겠지. 한 사람만으론 안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명이 수십 번은 찍어야 했겠지. 나무를 다듬은 후엔 가마에 불을 피우고 숯을 구웠을 것이다. 나무를 베고, 숯을 굽는 작업이 며칠은 걸릴 터이니 저쪽 터에 움막을 짓고 오가지 않았을까. 참으로 고된 생활이다. 옛 사람들의 흔적을 되짚어 보니 지금 얼마나 풍족하고 편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새삼 감사한 마음이 스민다.      


동백동산의 하이라이트먼물깍

숲의 정취에 취해 걷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또 다른 풍경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동백동산이 숨겨 놓은 반짝이는 보석, 먼물깍이다. 동백동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못이다. 잔잔한 연못 같은 먼물깍은 땅 속이나 바위 틈에서 샘솟는 물이 아닌 오로지 하늘에서 내린 비를 담고 있다. 점성이 낮은 파호이호이 용암(pahoehoe lava)이 흐르면서 만든 지대이기 때문이다. 움푹 팬 용암 지대에 물이 빠지지 않고 고여 수많은 습지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비가 오면 땅 속으로 물이 모두 빠져 버리는 제주에서는 참 진귀한 풍경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 마음도 차분해진다. 갑자기 적막을 깨고 개구리 한 마리가 풀쩍 뛰어오른다. 먼물깍에는 비바리뱀과 물장군, 긴꼬리딱새와 같은 멸종 위기의 생물들이 산다는데 워낙 희귀해 직접 보기는 어렵다. 이들이 오래오래 평화를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마음 속 깊이 빌어본다.  


주소 : 제주시 동백로 77

문의 : 064-784-9445(탐방안내소)

홈페이지 : http://ramsar.co.kr      



TIP.

동백동산은 해설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더욱 유익한 탐방이 된다. 동백동산과 관련한 인문, 역사, 생태학적인 이야기들이 흥미를 끈다. 동백동산 습지센터를 통해 사전 예약하면 된다. 탐방 할 때는 안전을 위해 운동화나 트레킹화를 착용해야 하며 구두나 샌들은 입장에 제한될 수 있다. 숲 지대가 완만하고 평지여서 아이들과 탐방도 가능하지만 울퉁불퉁한 돌길이 많고 나무 뿌리가 돌출되어 있는 곳들이 많아 탐방 시 주의해야 한다.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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