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굼지오름
제주 남서부 해안가에는 산방산과 송악산이 터줏대감처럼 굳건히 서 있다. 그 사이에 바굼지오름이 있다. 오랜 시간 비바람에 깎이고 패인 험준한 바위산이 거친 상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름에 얽힌 유래만 서너 개
바굼지오름은 제주 섬에서는 보기 드문 바위산이다. 그저 스쳐가다 보았다 해도 한 번 눈에 들어온 모습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멀리서도 눈길을 끄는 건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치솟아 있는 봉우리들이다. 녹음이 우거진 오름 상단에 뾰족하게 벼려진 암벽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나 있다.
독특한 생김새처럼 이름에 얽힌 유래도 흥미롭다. 바굼지는 제주어로 ‘바구니’란 뜻이다. 오름 형태가 날개를 펼친 박쥐를 닮아서 바구미(박쥐의 옛말)로 부르다 점차 비슷한 말인 바굼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 같다고 해 바굼지라 불렸다는 설도 있으며 옛적 바닷물이 차올랐을 때 오름이 바구니만큼 보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바굼지를 한자로 변환해 ‘대광주리 단’을 붙여 단산(簞山)이라 불렀다. 같은 오름을 두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분분한 것은 바굼지오름이 그만큼 변화무쌍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굼지오름은 바라보는 방향과 각도, 거리에 따라서 형태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특히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직 벼랑과 거대한 암벽들이 드러나며 위압감마저 준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발걸음이 적지 않은 이유는 보이는 것보다 오르기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바윗길과 경사가 심한 구간이 더러 있긴 하지만 이들만 잘 넘기면 근사한 전망으로 선물로 준다. 대신 밑창이 단단한 트레킹화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길
오름 주변은 푸릇하게 자란 마늘이 가득하다. 밭 사이에 세워진 방사탑을 지나 400m 정도 더 걸음하면 탐방 안내판을 찾을 수 있다. 초반엔 비탈진 경사면과 표면이 고르지 못한 암반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힘겹게 느껴진다. 급경사 구간에는 오르기 쉽도록 밧줄이 늘어뜨려져 있다. 경험한 바로는, 괜한 고집으로 혼자 힘으로 오르려 하지 말고 줄을 잡고 힘을 아껴가며 오르는 것이 낫다. 탐방로를 벗어나면 바로 낭떠러지 같은 절벽이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능선에 닿을 때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바굼지오름은 비고 113m 정도로 높지 않아 이 고비만 넘기면 금세 정상부에 오를 수 있다.
바굼지오름은 능선을 따라 여러 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는데 첫 봉우리에 오르기까지는 약 10분 면 충분하다. 이곳에만 닿아도 멋진 전경을 품에 안을 수 있다. 산방산과 송악산 양쪽에 조각보를 걸쳐둔 것 같은 너른 들판과 파란 캔버스에 그려 넣은 형제섬이 그야말로 명작이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편편한 암반이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힘겹게 올라온 만큼 큰 보상을 받은 듯해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능선을 따라 10분 남짓 오르는 동안 소나무 숲이 대나무가 빼곡한 오솔길로, 바위 투성이 산길로 끊임없이 모습이 바뀐다. 조금 편해진 발걸음에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한라산부터 마라도까지 파노라마 뷰
좀 전에 받은 감흥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정상에는 더욱 근사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가까워 보이는 산방산이 거대하고 웅장한 면모를 과시하는 데다 송악산에 가려져 있던 가파도와 마라도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다를 등지고 돌아서니 정면에 한라산이 눈에 들어왔다. 신령스러운 산이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오름과 숲,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과 밭들이 파노라마를 펼친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경관 앞에선 최신식 카메라도 맥을 못 춘다. 직접 맨 눈에 담아야 이 풍경의 진가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삐죽이 솟아오른 암벽들을 비롯해 탐방로를 오가며 지나쳤던 기이한 지층 구조들은 원시 제주의 산물이다. 용머리해안에서 처음 화산 폭발이 일어나면서 원래 바다였던 곳에 섬의 기반이 되는 지층이 형성되었고 그 땅에서 산방산과 바굼지오름이 탄생했다. 오래된 퇴적층과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다양한 암석들은 태곳적 제주를 상상하게 한다. 백만 년 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바굼지오름을 탐방하는 길은 원시 제주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이나 다름없다.
아쉽지만 탐방길은 여기까지 정비되어 있다. 동쪽 능선과 봉우리는 길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데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뿐이어서 가기가 힘들다. 탐방길을 벗어난 등반은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때론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더 나은 때가 있다.
바굼지오름과 추사 유배길, 대정향교와 안덕계곡
바굼지오름 기슭에는 대정향교가 자리한다. 바굼지오름을 병풍처럼 두른 대정향교는 옛 선인이 그린 수묵화처럼 소박해 보인다. 대정향교는 처음 대정성 북쪽에 창건되었다가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옮겨졌다고 한다. 1653년 효종 때 지금 위치에 세워졌으며 옛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단정하고 검소한 멋을 풍긴다.
대정향교의 역사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제주로 유배를 왔던 그는 수 년 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곳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향교 안에는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와 같은 노송이 자라고 있어 김정희가 이에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록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을 받는 신세였지만 제주 목사와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니 어쩌면 그도 한번쯤은 바굼지오름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에서 보낸 그의 행적이 궁금하다면 추사관을 들려보자. 추사관을 출발해 대정향교와 바굼지오름을 거쳐 안덕계곡까지 이어지는 추사 유배길도 걸어볼 만하다.
울창한 숲과 기암절벽, 맑은 물이 흐르는 안덕계곡은 조선 시대부터 으뜸가는 명승지로 손꼽혔던 곳이다. 현실을 벗어난 신비로운 정경에 많은 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노래를 읊었으며 그 명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 <구가의서>와 <추노>의 명장면이 탄생되 장소이기도 하다. 안덕계곡 입구는 일주서로에 접해있는데 조금만 걸어 들어가도 금세 깊은 계곡 같은 분위기이다. 절벽 아래 작은 샘터가 있는데 물맛이 좋아 차 애호가였던 김정희 선생이 종종 물을 길러 왔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맑은 날보다 흐리거나 비가 온 후 찾으면 더욱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주소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 124-1번지(바굼지오름) /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1946(안덕계곡)
TIP.
오름 탐방 후 피로를 푸는 산방산 탄산온천
바굼지오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온천욕을 즐기는 산방산 탄산온천이 있다.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좋다. 국내에서 보기 힘든 탄산온천으로 원탕의 수온이 체온과 비슷하다. 처음엔 미지근하지만 오래 앉아 있으면 몸에 기포가 생기며 혈액순환을 도와 점점 따스하게 느껴진다. 산방산을 바라보며 즐기는 노천탕이 운치 있다.
주소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 124-1번지
문의 : 064-792-8300
*국내여행전문지 <여행스케치>에 2021~2022년에 연재되었으며 여행정보는 변동될 수 있으니 방문하시기 전에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사에 대한 텍스트,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기사에 대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