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길 즉, 인생의 동반자...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 2편
나에게 인도는 잊을 수가 없는 특별한 나라이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힘들 때 이렇게 힘든 시기가 또 있을까 하고 자포자기하며 이곳으로 도망치듯 여행 올 때, 하나님은 나에게 특별한 경험을 시켜 주셨다. 그것은 한국에서는 절대로 겪어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하고 다이내믹한 경험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난 내가 한국에서 겪은 고민과 아픔이 사실 얼마나 행복한 고민이고 별것 아닌 걱정이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과사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 내가 힘들다고 생각한 것들... 사랑에 대한 아픔,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은 정말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것이 사실 얼마나 행복한 고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갈 삶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첫날 인도에 도착하고 겪은 호된 신고식은 다이내믹 인도 여행을 알려주는 예고편이었다. 여행 중에 사기를 당하고 비행기를 두 번씩이나 놓쳤다. 한 번은 내 실수로 놓쳤고 두 번째는 피치 못할 천재지변으로 한국 돌아가는 비행기를 못타 국제미아가 될뻔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2015년 6월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중동호읍기질환 '메르스'로 추정? 되는 병에 걸려 네팔 현지 병원에 며칠간 입원까지 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입원 중에 지진까지 겪게 되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건들을 인도 여행을 통해 경험했으니 정말 이건 내 인생 통틀어 이전에도 앞으로 잊을 수가 없는 강렬한 여행이었다.
특히 자칭 메르스?(실제 내가 메르스 걸렸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당시 네팔 병원에서 진료받을 때 내 병명은 장티푸스로 진단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한번 검진해보니 국내 병원에선 이건 장티푸스라 아니라고 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메르스로 인해 온 나라가 벌집 쑤시듯 발칵 뒤집힌 때였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메르스 걸리면 나타나는 병의 증상, 그리고 메르스에 걸리게 되는 경로 등을 홍보했는데 내가 걸렸던 증상과 경로가 메르스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병에 걸리기 한 달 전 난 낙타를 탔다......-_-; 그래서 메르스라 추정하는 것이고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국내 메르스 환자 1호이다. 다행히도 난 해외서 이미 메르스를 치료하고 국내에 들어와서 별 탈이 없었던 거 같다.) 걸렸을 때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여행이 한창이었던 2015년 4월 말, 당시 나는 다즐링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뉴스에서 네팔 대지진을 알리는 긴급속보가 방송됐다. 진도 8의 강력한 지진으로 인해 카트만두, 랑탕, 에베레스트 지역 등이 피해를 입게 되었고, 80년 만에 대지진이라 네팔 정부가 감당하기에 엄청난 자연적 재해였다.
지진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네팔뿐만 아니라 북인도 지역까지 흔들렸는데 내가 있었던 다즐링도 흔들거렸다. 다즐링은 네팔과 아주 가까운 히말라야 산간에 위치한 작은 도시여서 네팔 대지진의 여파를 간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여진이 다즐링 지역까지 계속 찾아와 내가 묶고 있던 숙소 건물이 흔들려 황급하게 뛰어나왔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날 밤 여진의 공포 때문에 마음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콜카타로 내려가는 버스표를 구입하고 다음날 콜카타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진을 피해 콜카타로 내려왔는데 우연히 인도 여행카페에 올라온 대지진 자원봉사자 모집글을 보게 되었고, 순간 네팔에서 만난 순박했던 사람들이 지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난 고심 끝에 네팔 대지진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여진의 위험이 있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사실 설마 또 한 번 강력한 지진이 오겠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갔지만 일주일 후 진짜 또 한 번 강력한 지진이 오게 될 줄 그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예정에 없던 네팔행 비행기표를 서둘러 예약하고 며칠 뒤 네팔 카트만두로 떠났다.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자원봉사자들을 만나고 보다나트 위치한 숙소에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하려 했다. 그런데 몸상태가 심상치 않다. 사실 콜카타에서 출발할 때부터 몸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는데 카투만두 도착하니 몸살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콜카타에서 며칠 동안 더위로 인해 잠을 잘못자 피로가 누적되어서 그렇구나 생각하고 그날 밤 종합감기약 한 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보통 몸살 기운 있을 때 저녁을 먹고 약을 먹은 후 일찍 잠자리 들면 다음날 몸살 기운이 없어지는데 이상하게도 그다음 날에도 몸살 기운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어제보다 더 심해졌다.
결국 나는 봉사 활동하러 네팔에 갔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병에 걸려 봉사활동 기간 내내 누워 지냈다.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얼른 나아서 봉사활동에 참여해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지 병원에 갔다 오고 약을 먹고 하루 종일 푹 쉬었지만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며칠간 고열과 구토에 시달렸고 나의 상태를 지켜본 봉사활동 대장이 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큰 병원에 나를 데려다가 정확한 진료를 받게 했다. 검사 결과 병원에서는 장티푸스라는 진단을 받았다.
장티푸스...? 내 생전에 장티푸스 걸리긴 처음이네...
결국 난 입원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봉사활동을 갔는데 오히려 반대로 병을 얻어 장티푸스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다니.... 하도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다. 그렇게 나는 봉사활동 구호단체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 내 이런 상태를 당시 봉사활동 대장이 대사관에 신고를 하였고 대사관에서는 나의 상태를 확인하러 병문안을 왔을 정도다. 입원을 하고도 며칠간 밤이면 고열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니 상태가 점차 호전되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5일째, 이제 고열은 많이 없어졌고 몸상태는 괜찮아졌다. 퇴원을 해야 하는데 문득 입원비용이 걱정되었다. 그때 당시 내 통장 잔액은 170만 원 정도 남았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네팔 봉사활동을 마치고 남은 금액으로 동남아를 한 달간 여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생각하지도 못한 입원으로 인해 여행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담당 간호사에게 현재까지 입원비용이 얼마 되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뒤 담당 간호사가 나에게 입원비용이 계산된 계산 명세서를 보여줬는데 보는 순간 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5일간 입원비용이 무려 9만 5000루피!!!
우리 돈으로 약 150만 원이 청구됐다!!! 오 마이 갓!!
이렇게 되면 남은 여행비용 거의다 입원비용으로
꼻아박게 생겼다.
너무 깜짝 놀라 난 간호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당장 퇴원시켜 줘요!! 그러자 간호사는 담당의 소견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루 더 입원하면 내가 가진 금액 다 털고도 부족하게 되니 이건 막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서 빨리 담당의 불러달라고 재촉했다. 간호사는 아직 담당의가 출근 안 했다고 하자 난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영어로 담당의에게 내 몸상태와 내 사정을 적어서 간호사에게 주며 담당의 출근하면 바로 이 쪽지 보여주고 바로 나한테 오라고 전달했다. 난 오늘 무조건 퇴원해야 합니다. 이걸 강하게 강조하면서!
내 심각한 표정을 읽은 간호사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1시간 뒤 담당의가 도착했다. 담당의는 내가 보낸 쪽지를 읽고 알겠다고 하고 퇴원해도 좋다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말했다. 담당의사의 퇴원 소견이 떨어지자마자 난 서둘러 퇴원수속을 밟았고, 입원비용 정산하기 위해 병원 사무실로 갔는데 또 한 번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
정산을 하는데 9만 5000루피가 아니라고 한다. 오늘 아침 나에게 투약한 약값이랑 기타 비용 포함해 총 10만 5000루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에 난 화가 난 나는 병원 직원을 상대로 소리쳤다. 야! 너희들이 나한테 보내준 계산서에는 분명 9만 5000루피라 되어있어! 하면서 계산서를 직원 눈앞에 다시 한번 들이대 밀었다.
그 직원이 '그건 아는데 오늘 약값이랑 기타 비용 포함 안된 거다. 그 비용까지 지불해야 한다.' 이렇게 맞서는 것이었다. 이미 난 여기서 더 이상 비용을 지불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돈 전부를 지불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난 진짜 돈 한 푼 없이 국제거지가 되는 절박한 위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난 절대로 합의 볼 수가 없었다. 분명 너희들이 나에게 보여준 계산 명세서에는 이 비용이라고 기록돼있다. 강하게 주장하면서 남은 돈은 못 내겠다고 버텼다. 병원 측에서는 안된다. 내야 한다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양측 다 영어로 대화를 했지만 의사소통에 곧 한계가 있어 구글 번역기 돌려가며 항의하고, 병원 측에선 한국어 할 줄 아는 직원 없는지 찾아보고 난리가 아니었다. 결국 병원 측 고위인사한테 까지 보고 됐는지 고위인사급인 사람이 나와 중재하면서 오늘 아침에 투여한 약값 3000루피만 내는 걸로 겨우겨우 합의 봤다.
겨우 합의 봤지만 난 병원비용 지불하면서 화가 풀리지 않아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병실에 가서 내 가방이랑 이것저것 챙겨 나가려고 하는데 담당 간호사가 나를 부른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죄송한데 다른 비용(지금은 생각이 잘 안 난다) 빠져서 이것도 지불하셔야 한다고 말이다.
순간 나는 어이없으면서도 이것들이 내가 외국인이니까 장난치나? 생각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그 자리에서 야!! 너네 장난하냐??! 크게 화를 내는 순간 갑자기 건물이 심하게 흔들린다. 전에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커다란 충격과 흔들림이었다. 네팔 2차 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진도 7.4의 2차 네팔 지진)
천장에서는 건축자재물과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벽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진은 몇 차례 경험해 봤는데 이렇게 큰 지진은 난생처음 겪어본다. 순간 내 몸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나랑 싸우던 간호사들이 나를 붙잡고 얼른 건물 밖으로 대피해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뜬 나는 미친 듯이 계단을 통해 병원 건물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물건이고 뭐고 생사가 달린 지금,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내 목숨 건져보고 보자였다.
이때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죽음의 위기 앞에 생전에 겪은 아픔과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그것은 생사라는 문제 앞에서는 정말 행복한 아픔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상처로 가슴 아파했던 지난날들의 아픔은 지진이라는 대자연적 위기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힐링이 돼 버렸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온갖 고민, 걱정, 고난, 고통, 상처, 증오, 미움은 생각 조차 나지 않았다. 오직 살아남아야겠다 라는 원초적인 본능만 있었을 뿐이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나보다 앞서 탈출하던 어떤 중년 남성은 떨어지는 건축자재물이 머리를 강타해 머리에 피를 흘리며 탈출하고 있었다.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서로 뒤엉키며 탈출하기 바쁘고, 환자들은 휠체어를 타고, 병상에 누워 거동이 힘든 환자들은 간호사들이 황급히 병상을 움직이며 탈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병원 관계자들 안내로 병원 옆 공터로 대피했다. 지진은 5분간 더 지속돼 전봇대 전깃줄이 끊어지려 그러고, 병원 건물이 지진으로 휘청거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면서 한동안 충격에 빠져나오질 못했다.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하였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잠시 후 지진은 끝났지만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한동안 충격과 공포에 빠져나오질 못했다. 여기저기 우는 사람들, 다친 사람들, 전화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사람들 등등....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이런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병원 건물 안에 내 배낭과 옷들이 있었다. 지진이 끝나도 한동안 병원 건물에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언제 또 강력한 지진이 엄습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쉽사리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지진 발생 3시간 후 용기를 내어 후다닥 병원 건물에 들어갔다. 얼른 배낭만 들고 나올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하필 이면 병실 문이 잠겨있었다. 대피하던 와중에 누군가 문을 잠겄던 거 같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는데 정말 등골이 오싹거렸다. 그 와중에 지진이 다시 한번 발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의 공포감이 엄청났다.
(배낭은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가서 찾게 됨, 남은 병원비용 지진 발생으로 묻힘, 돈 안 냄)
황급히 병원 건물 밖으로 나간 나는 택시를 타고 원래 숙소로 돌아왔다. 자원봉사자 사람들도 대지진에 매우 놀라 황급히 대피하여 공터에서 네팔 주민들과 함께 천막을 치고 있었다. 그날 밤 대부분의 네팔 주민들은 천막에서 밤을 보냈는데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숙소 안에서 잤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나도 정신이 덜 돌아온 거 같았다. 혹시 모를 여진에 대비해 가장 중요한 물건들은 복대에 메고 잤다. 만약 지진이 발생하면 바로 탈출할 수 있게 내 몸의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며 잤다. 다행히 그날 밤 중간에 여진이 오긴 했지만 5초 정도 흔들리다 말았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날 밤 나는 살아있음에
그냥 감사했다.
생사의 위기 속에서
느낀 감사였다.
그렇게 나는 지진으로 인해 엉뚱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자원봉사자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과 민폐를 끼쳐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인도 콜카타로 돌아갔다. 다시 콜카타로 돌아온 내 수중엔 10만 원 밖에 안 남았다. 당초 계획했던 한 달간 동남아 여행은 이렇게 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한편으론 이미 방콕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아서 바로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남은 돈으로는 한국에 돌아갈 비행기표도 구할 수도 없어 일단, 방콕으로 가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알리자 다행히도 친구들이 얼마씩 돈을 빌려줘서 방콕에서 며칠 지낼 수 있는 비용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구입할 수 있는 비용이 채워졌다. 그렇게 인도 여행을 마무리했다. 인도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정말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5월 17일 나는 방콕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3박 4일 지내고 하노이를 통해 귀국하는데 여기서도 또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정말 이번 여행은 한국 돌아가기가 참 쉽지 않았다. 그것은 하노이 공항에서 천재지변으로 인해 비행기가 착륙을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미리 예약해 놓은 하노이 출발 인천행 비행기를 못 타게 되는 돌발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돌발상황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하노이 공항에 홀로 앉아 어이가 없이 그저 허탈하게 웃기만 했다. ㅜㅜ
어쨌든, 결국엔 정말 정말
어렵게 귀국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나를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