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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Nov 19. 2021

늦가을에 떠나는 문학의 숲,
영동을 가다.

월류한천, 달도 쉬어가는 월류봉과 그 아래 흐르는 초강천의 풍경을 이르는 말이다. 그 풍경 속에 조선시대 사람 송시열이 머물렀다. 황간역은 시를 적은 항아리가 사람들을 반기는 곳이다. 노근리 사건을 내용으로 한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의 배경무대인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에는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피살된 양민들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다. 신라와 백제의 전장이었던 양산면 송호리 송림에 신라 사람들이 지은 <양산가> 노래비(시비)가 있다. 그 솔숲에 시인 권구현의 시비가, 숲 밖에는 이영순의 시비도 보인다.


한천정사 마당에서 월류봉 산줄기가 보인다.


한천정사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월류한천. 월류봉과 그 아래 흐르는 냇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시의 세상으로 떠나는 출발역,
 황간역


달도 머물렀다 가는 월류봉과 그 아래 흐르는 초강천이 어울린 풍경을 두고 ‘월류한천’이라고 한다. 그곳에 있는 월류봉, 냉천정, 법존암, 산양벽, 사군봉, 청학굴, 화헌악, 용연대 등을 한천팔경이라 이른다. 그 풍경 속에 서재를 짓고 글을 가르치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조선시대 사람 우암 송시열이다.


월류봉 정자 아래로 초강천이 흐른다.


월류봉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월류한천’의 풍경에 묻혀 시를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그를 기리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한천서원을 지었다. 고종 임금 초기에 서원이 철폐됐는데, 1910년 유림들이 한천정사를 다시 지었다.  


월류봉 비석 뒤로 정자가 보인다


‘월류한천’을 뒤로하고 황간역으로 향했다. 언젠가 시를 적은 항아리가 전시되면서 황간역은 시의 세상으로 떠나는 출발역이 됐다. 역 건물 앞마당에 항아리가 즐비하다. 항아리 하나에 한 편의 시가 담겨 있다. 시가 적힌 항아리를 하나하나 짚으며 읽는다. 송찬호 시인의 시 <민들레역>이 눈에 들어왔다. 


황간역 앞마당 시가 적힌 항아리 중 하나. 송찬호 시인의 시 '민들레역'이 적혀 있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가 매여 있지 않은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먹고 있다

에구, 이 철없는 쇳덩어리
오목눈이 울리는 뻐꾹새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 양말 무릎까지
끌어 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 송찬호 시인의 시 <민들레역>


황간역 경부선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하옥포2길 14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역사, 
노근리 사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노근리평화공원은 한국전쟁 때 미군에 의해 양민들이 학살당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시냇물 흐르는 쌍굴(개근철교) 옹벽에 하얀색 페인트로 동그라미와 세모 모양을 그려 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들을 향해 발사한 총탄의 흔적을 표시한 것이다. 


노근리 평화공원 앞 쌍굴(개근철교). 옹벽에 표시된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는 미군이 발포한 총탄의 흔적이다.


공원에 있는 노근리 사건을 알려주는 안내판에서 그날의 역사를 보았다. 1950년 7월25일 저녁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임계리, 주곡리, 타 지역 주민 등 500~600명)은 미군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7월26일 정오 무렵 철길을 따라 걷는 피난행렬에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기 시작했다. 7월26일 오후부터 7월29일 오전 사이에 노근리 쌍굴(개근철교)에 피신한 피난민에 미군은 기관총으로 사격을 시작했다. 정은용 씨가 노근리 사건을 내용으로 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화소설을 발표했다. 

1999년 10월부터 2000년 1월까지 한미 양국은 노근리 사건을 공동으로 조사했으며 2001년 1월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노근리 평화공원에 있는 조형물 '모자상'


노근리 평화공원 모자상 뒤에 그날을 애도하듯 하얀색 조화가 놓였다.


노근리평화공원 한쪽에 조형물들이 놓여 있었다. ‘모자상’이라는 제목의 조형물이 그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노근리 사건 당시 갓난아기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총탄에 맞아서 이미 숨진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모습을 재현했다. 


노근리평화공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목화실길 7 비스터쎈




<양산가>의 무대 금강 가 송호리 송림


삼국시대 신라군과 백제군이 지금의 영동군 양산 금강 가에서 전투를 벌였다. 김흠운이 이끄는 신라군대가 백제 땅 양산 금강 가에 진을 쳤다. 백제의 수도를 공략하기 위해서 조천성을 공격하려는 계획이었다. 백제군은 신라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동틀 무렵 신라의 군영을 기습한 백제군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당시 김흠운은 전사했다. 그가 바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 신라 사람들은 김흠운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와 노래를 지었다. 그게 바로 <양산가>다. 


양산가 시비(노래비)


충북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금강 가 솔밭에 <양산가>를 새긴 시비(노래비)가 있다. 시비(노래비)에는 한문으로 된 양산가와 이를 국역한 내용, 노래로 구전되던 내용이 새겨져있다.


도야지 같은 원수의 나라
나의 조국을 침노하나뇨
용맹스러운 화랑의 무리
나라 위한 충정 어이 참으리
창을 메고 내 집을 멀리 떠나와
풍찬노숙 싸움터로다

장하도다 나라 위해 목숨 바쳤네

천추에 빛나는 호국의 영령
길이길이 명복을 누리옵소서

-국역한 양산가 중 일부


송호국민관광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280




솔숲 한쪽에 있는 권구현 시비


송호리 송림에는 영동 출신 시인 권구현의 시비도 있다. 1898년 8월 영동군 양강면 산막리에서 태어난 권구현 시인은 1926년 시대일보에 <시조4장>을, 1927년 별건곤 2월호에 소설 <폐물>을 발표했다. 같은 해 시집 [흑방의 선물]을 발간했다. 그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일제에 저항하며 시를 썼다. 송호리 송림 사이에 놓인 시비에 그의 시 <구천동 숯장사>의 일부가 새겨졌다. 


송호리 송림에 있는 권구현 시비



외로운 별 하나
외로운 별 하나
떨어질 듯이 깜박이고 있는
천마령 높은 재를
이슬 찬 이 밤에 어찌나 넘으려노

우거진 숲 속에는
부엉이 소리마저 처량한 이 밤을
게다가 무거운 짐을 진 몸으로
혼자서 어찌나 넘으려노
구천동 숯장사야

-권구현 시인의 시 <구천동 숯장사>


송호리 송림을 나서는 길에 영동 출신 이영순 시인의 시 <나비>가 새겨진 시비를 보았다. 



나는 八月의 나비가 된다
神의 부드러운 입김을 속 입으며
동녘의 하늘을 난다
도라지꽃 피는 언덕 너머
사랑이 숨 쉬는 님의 품 안
눈을 감은 채 날개는 닿는다

-이영순 시인의 시 <나비>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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