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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국내여행

먹을 것 천지,
백일홍도 한가득 '평창' 가을여행

by 트래비 매거진

여태껏 직접 보지 못한 이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 메밀밭이란, 봉평의 그 밭이다.


KakaoTalk_20230907_160431353_06.jpg?type=w1200 평창 봉평의 메밀밭, 하얗게 비추는 흐뭇한 그 달


정기적 나들이의 목적


메밀꽃 필 무렵. 가산(可山, 이효석 작가)의 글이 달빛처럼 흐뭇하게 스쳐 지나간, 굵은 소금을 흩뿌린 듯 새하얀 그 밭이 지금 만개 후 구수한 메밀 이삭을 맺고 있다. 매년 가을 나는 ‘그 메밀밭’을 찾아 왔다. 이번에도 갔다. 바야흐로 가을의 한복판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메밀밭 방문이다. 정확히는 메밀꽃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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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달이 가득 차올랐을 때 맞춰 평창 봉평을 갔다. 예고대로 달은 휘영청 밝았지만 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이듬해 9월 하순 또 한 번 갔다. 꽃은 제법 피었지만 달은 창호처럼 얇은 구름 뒤로 숨고 말았다. 이처럼 자연이란 늘 마음 같지 않다. 코로나로 말썽이던 지난해 기여코 달과 꽃이 함께한 순간과 마주쳤다. 넓은 꽃밭을 하얗게 비추는 ‘흐뭇한’ 그 달을 만나고야 말았다. 메밀꽃은 풀벌레 우는 밤에 봐야 좋다. 고운 달이 부끄러워 숨어들지만 않으면 됐다. 이효석 작가의 소설 속 ‘그 달’과 꽃은 어두운 밤의 터널 속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은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는, 그 은은한 하얀 마음은 가을밤을 빛내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이다. 하늘에 드리운 하얀 커튼과 땅에 펼쳐진 보료 같은 꽃밭. 메밀꽃잎보다 더 옹색하던 사람의 마음도 이 광경 앞에서 마침내 활짝 피고 말았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을 앞두고 순백의 서막이 열렸다. 갑자기 도망치듯 여름이 사라져 버리고 난 올 가을에도 평창에 젖니처럼 희고 자그마한 메밀꽃이 툭툭 터졌다. 습하고 묵직한 여름을 밀어낸 청량한 바람에 실려 순식간에 봉평 푸른 들을 온통 뒤덮을 기세다. 살짝 귀띔을 하자면 이 꽃이 지고 나면 메밀이 영근다. 아, 결국 내 정기적 나들이의 목적은 메밀이었던가.


KakaoTalk_20230907_160446870_02.jpg?type=w1200 메밀막국수, 쌉쌀하고 구수한 향이 좋다


평창 vs 팽창


가을 평창엔 먹을 것 천지다. 우선 봉평은 메밀꽃 덕분인지 잘하는 막국숫집이 그리도 많다. 싱그러운 메밀향이 가득한 면발을 시원하면서도 칼칼한 양념에 매매 비벼 주루룩 빨아내면 서늘한 날씨와 닮은 그 맛이 아주 좋다. 적당히 먹다가 머릿통까지 ‘쩡’한 육수를 부어 말아 먹으면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배로 든다. 한 번에 두 그릇 먹은 기분이다. 어여쁜 꽃 지고 얻어 낸 메밀일 텐데 어찌 국수만 뽑아 먹을까. 메밀 부꾸미, 메밀 전병(총떡), 메밀묵밥 등 쌉쌀하고 구수한 메밀 향기가 가득한 토속 음식이 식욕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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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은 부드러운 식감에 비해 포만감이 빠르게 차오른다
image_8736215691695171794893.jpg?type=w1200 평창한우마을 봉평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식육식당


대관령과 봉평에선 그 유명한 평창 한우도 즐길 수 있다. 숯불 피워 놓고 고기를 구우면 집 나간 식욕이 당장 돌아온다. 등심도 좋고 갈빗살도 맛난다. 평창한우마을 봉평점에서는 저렴한 값에 질 좋은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이외에도 민물매운탕과 송어회 등 다른 곳에서 찾아 먹기 어려운 평창의 먹거리가 다양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쯤되면 평창이 아니라 (배가) 팽창이다.


KakaoTalk_20230907_160440477_04.jpg?type=w1200 플라이낚시를 하는 모습, 신바람 내며 가을을 낚는다


평창의 가을 밤은 에어컨 실외기 투성이 도시보다 차갑다. 습기도 덜해 보송하다. 이때 밤나들이를 나선다. 차가운 평창강에는 기운 센 열목어가 돌아다닌다. 시린 물에서 더욱 힘찬 꼬리짓을 펼치는 열목어를 보고 꾼들이 모인다. 팽팽한 낚싯줄이 가을바람을 가른다. 산 그림자 아래 계곡에 서서 캐스팅(플라이낚시에서 미끼를 원하는 곳으로 던지는 것)을 척척, 신바람 내며 계절을 낚는다. 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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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낚시에 비해 플라이낚시는 조금 낯설다. 국내엔 19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알려지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92년 때마침 개봉한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의 영향도 제법 컸다. 영국의 귀족 낚시 게임에서 시작됐다는 플라이낚시는 영화처럼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노끈과 실을 묶어 직접 만든 미끼를 쓰고 ‘캐치 앤드 릴리즈(잡고 놓아주기)’ 등 친환경 낚시다.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이고 동적이면서 정적인 묘한 매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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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강변에는 백일홍도 한가득 피어난다. 가을볕을 받아 현란한 색을 발하는 꽃밭은 가을님이 오시는 길을 환영하는 ‘레드 카펫’이라 할 수 있다. 밤에는 그 어떤 네온보다 화려하다. 꽃만으로는 도저히 엉덩이가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시원한 청정 고원에서 놀거리를 찾아보면 된다. 땅이 하도 높아서 ’하늘이 겨우 석 자’라는 북평창 봉평땅은 해발 700m에 가까운 고원으로 1,000m 고산준령이 즐비하다. 각 산의 신령이 모인다는 회령봉(1,324m)에는 모처럼 시원하게 걸어 볼 수 있는 산행로가 있다. 덕거리 연지기 마을로부터 완만한 임도의 오르막길을 서너시간 이상 걸으며 폐부를 씻고 올 수 있다. 그리 덥지 않은 가을이니까.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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