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예전이 더 좋았다고.
지진 이후, 사람들은 기대마저 무너뜨렸다.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만두’라고.
여전히 놀라운 역사와 자연의 도시라고.
Unesco World Heritage
재생하는 도시 카트만두
카트만두에 내 발자국은 어쩐지 동그라미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야 여행자의 숙명이겠지만
카트만두에서는 스투파를 돌고, 마니차를 돌리고,
산을 오르내리며 자꾸만 처음으로 돌아오는 법을 배웠다.
Heritage 1
진리는 입이 없다
사람들이 벽을 따라 돌고 있었다. 시계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 행렬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네팔 최대, 세계 최대 크기라는 스투파다. 하루 종일, 일년 내내 보다나트(Boudhanath) 사원이 북적거리는 이유다. 얼마나 큰지, 스투파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마니차*를 돌리며 한 바퀴를 도는 데만 해도 수십 분은 족히 걸린다. 지루하다 싶어지지만 스투파의 사면에 새겨진 붓다의 눈동자를 피할 수가 없다. 그 위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제3의 눈까지 새겨져 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입이 없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은 것도 착각일지 모르겠다.
여전히 ‘구함’이 있는 이들은 스투파 옆에 있는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들어가 스님들의 축복을 청한다. 스투파 둘레에 있는 여러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4개 종파에 각각 속한 곳들이다. 그중 한 곳에 들어가 영문도 모른 채 불공에 합류하게 됐다.
젊은 스님들이 착석을 하고 나자 낯선 모양의 법구(法具) 연주와 염불소리가 나지막이 깔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무릎을 꿇고 기다리던 서양인 청년을 잘 지켜보다 그의 동작을 똑같이 따라했다.
손바닥에 따라 주는 성수도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시주까지 마치고 축복받은 몸이 되었으나 절 밖으로 나와 속세의 물결에 휩쓸리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옹성을 친 듯 스투파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염주, 종, 탱화를 파는 판매소들이었다. 필요한 만큼의 자비도 구하고 필요한 종교용품들을 한꺼번에 구할 수 있으니 좋은 것이리라.
*마니차 | 경전을 넣은 경통으로,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으로 간주한다.
Heritage 2
살아 있는 만다라의 풍경
네팔 최고(最古)의 사원인 스와얌부나트(Swayambunath Stupa)에서도 스투파만 보면 목적 달성이라고 생각했다. 황금빛 첨탑 아래 빛나는 푸른 눈이 여기에도 있음을 확인했다. 계단을 300개나 올라가야 하는 사원의 위치적 이점을 살려서 카트만두 시내를 전망하는 것은 부가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방 사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중앙 스투파 옆에는 환자의 치유를 청하는 간절한 예불이 한창이고, 눈에 보이는 마니차마다 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네팔 사람들, 불탑 사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사방에서 출몰하는 원숭이들을 신기해 하거나 성가셔 하는 사람들이 엉켜 있었다. 사원에는 물, 불, 흙 등 창조의 원소를 상징하는 장소들도 있다. 그 모든 장면 앞에서 불현듯 떠오른 것은 좀 전에 본 만다라(Mandala)였다.
스와얌부나트 사원에서는 우리말로 ‘탱화’라고 하는 네팔과 티베트의 불교 채색화인 탕카(Thang-ga )장인들을 만날 수 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니 다양한 문양의 탱화와 만다라가 걸린 갤러리가 나왔다. 초보부터 마스터까지 숙련도에 따라 세밀함의 정도가 다른 것이 문외한의 눈에도 확연히 구분이 됐다. 최고 마스터의 작품은 부르는 게 값이다.
거칠더라도 나만의 만다라 한 폭을 완성해 낼 만큼의 집중력과 환경이 허락된다면 이생에서의 삶은 비교적 성공적인 것이 아닐까.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한 채 1년 동안 책상 위에 있는 컬러링북의 하얀 페이지가 아른거린다. 그 상념마저도, 넝쿨을 잡고 놀다가 떨어지고, 다시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새끼 원숭이 덕에 곧 흩어지고 말았다. 사원이 세워진 2,000년 전에도 원숭이들은 그랬으리라. 스와얌부나트 사원을 몽키 템플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나오는 길에 불상이 모셔진 연못 분수대에 동전을 던졌다. 멋지게 골인시켜서 원숭이들에게 수천년간 진화된 인류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었지만 역시 실패다. 바나나 한 송이나 사서 먹일 것을.
Heritage 3
두르바르(Durbar)를 기억하는 방법
인력거를 타고 타멜 거리(Thamel Street)를 관통하는 일은 그 자체로 어드벤처였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모호한 그곳에서 인력거는 카오스의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릴레이를 하듯 이어지는 도매 상가들을 스치며 소음과 먼지, 스릴 넘치는 승차감에 적응할 무렵 인력거가 멈췄다.
“자, 여기서부터 ‘카트만두성’입니다!” 본능적으로 성벽과 궁궐을 찾으려고 했지만,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2층, 3층 높이의 네와르(Newar)* 목조 건물마다 한가로이 앉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17세기에 하누만도카 왕궁 등 여러 건물이 지어졌고 19세기까지 왕족이 거주했던 카트만두 두르바르 광장(Kathmandu Durbar Square)에 도착한 것이다.
두르바르(Durbar) 는 왕궁이다. 네팔왕국의 중심지였던 카트만두 계곡에는 3개의 로열 시티가 있었다. 칸티푸르(현 카트만두Kathmandu), 랄릿푸르(현 파탄Patan), 박타푸르(Bhaktapur)가 그곳이다. 이 세 도시에는 궁과 별장, 정원, 대규모의 사원이 세워졌고 그중 살아남은 7개의 유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대부분 박물관으로 운영되어 왔는데, 2015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카트만두 두르바르 광장에도 여전히 지지대의 부축을 받은 채 겨우 지탱하고 선 건물들이 적지 않았다.
카트만두 남부, 바스마티강(Basmati River)남쪽에 위치한 파탄 두르바르 광장(Patan Durbar Square)의 상태는 조금 더 나아 보였다. 많이 손상되었다지만 초행자의 눈에는 14~18세기에 이미 이렇게 정교하게 벽돌, 나무, 청동, 돌을 다루는 기술이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로운 뿐이다. 기둥과 난간, 의자와 창문까지, 건물 전체를 빼곡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덮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시바 여신상 앞에서도 와아~, 왕궁의 건축을 명령한 시디히 나르싱 말라(Siddhinarsingh Malla), 1619~1660년 왕이 세정식을 했다는 수조의 화려한 석조 문양에서도 와아~, 황금 사원 입구의 화려한 파사드 문양에도 와아~, 2층에서 내려다본 거리 풍경에도 와아~를 외쳤다. 그러다 어느 중정에서 네팔 전통 의상을 입은 선남선녀와 마주쳤다.
또다시 와아~ 하고 감탄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싱가포르 친구가 혀를 찼다. 요즘 외국인들이 사진가와 코디네이터까지 동행해 화보를 찍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분명 어딘가 불편한 풍경이긴 했다. 커플이 멋진 포즈를 취하며 세트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석조전은 조금 전까지 누군가 열심히 불공을 올리던 곳이었으므로.
*네와르족 | 네팔 중부의 카트만두 분지에 사는 몽고계 네팔 민족.
글 천소현 기자 사진 천소현 기자, 페어필드 바이 메리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