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홍콩 와인 & 다인 페스티벌
평범한 와인 홈파티는 거부한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겠지만 여행으로 먹고 사는 여행기자에게는 유독 그렇다. 그래서 올해는 옷장에서 여행 가방을 꺼내는 대신 ‘술장고’에서 술을 꺼내는 일이 잦았다. 비우고 또 채웠다. 같은 처지에 놓인 후배 기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시간도 많고, (습관적으로)쟁여둔 술도 꽤 많았던 우리는 올해 종종 서로의 집을 오가며 술판을 벌였다. 반쪽짜리가 된 노동에 대한 불안감을 술잔에 털어 마셨다. 하지만 만약 둘중 하나가 소주나 맥주파였다면 이렇게 자주 마주하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의 취향은 같았다. 와인.
어느새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서로의 집에 방문할 때는 와인 한병을 가져가는 것. 물론 게스트를 맞이하는 호스트도 와인 한병을 따로 또 준비했다(우린 와인정도는 각 1병이 가능하다. 어떤 날엔 부족할 때도 있다). 서로 준비한 와인은 겹친 적이 없었고, 우리는 주로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와인으로 여행했다. 그 사이에는 간혹 조지아와 독일 그리고 아직 가본 적 없는 칠레와 아르헨티나도 있었다.
그동안 다녔던 와이너리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는 이렇게 한해가 지나가는 거냐며 탄식했다. 올해 줄줄이 쏟아진 랜선 여행이며 전시회, ‘여행가는 척’이라는 관광비행 상품에도 시큰둥했던 우리다. 하지만 홍콩 와인&다인 페스티벌은 좀 달랐다. 우리는 그동안 평범했던 와인 홈파티에 코로나19 시대상을 반영해보기로 작전을 세웠다.
홍콩과 와인의 상관관계
2008년 홍콩은 와인에 대해 관세를 폐지하는 행보를 나타냈다. 홍콩 쇼핑 리스트에 와인이 추가된 셈이다. 홍콩의 파격적인 결정에 결과는 뻔했다. 무관세 정책 이후 홍콩의 와인 소비량은 급증했고 와인 무역 규모도 커졌다. 홍콩은 와인과 관련된 박람회와 경매, 축제 등 여러 행사들을 유치했고 와인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계획대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와인 중개시장이 됐다.
관세 폐지 후 이듬해인 2009년부터는 홍콩관광청의 주최로 매년 10월 홍콩 와인&다인 페스티벌이 열렸는데, 아름다운 빅토리아 하버를 중심으로 수 백 개의 와인 및 음식 부스가 설치됐고 각종 다양한 이벤트로 낭만을 더했다. 값비싼 프리미엄 와인부터 가성비 좋은 데일리 와인까지 시음할 수 있는 축제에는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언젠가 꼭 다녀올 축제 중 하나로 마음 속에 저장해두고 있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 축제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열렸다. 수많은 축제와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열렸던 한해 속에서 그나마 작은 위로 같은 소식이다. 비록 보랏빛으로 물든 빅토리아 하버에 갈 수는 없지만 세계적인 셰프들과 와인 평론가들이 준비한 34개의 온라인 마스터 클래스는 언제, 어디에서나 참여할 수 있다.
온라인 와인 축제, 마시기도 전에 설렘
이번 와인 홈파티를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할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어떤 온라인 마스터 클래스를 선택할지 결정하는 것. 이는 다음 스텝인 음식 메뉴 선정과도 연관이 깊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을 서울 연희동 작은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제임스 서클링은 와인 에디터 출신으로 9년 전 홍콩으로 이주해 와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홍콩으로 이주한 결정적 계기가 ‘와인 관세 폐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그는 <New wave Bordeaux>
온라인 마스터 클래스에서 전통적인 와인 생산지 보르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물결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다. 이번 클래스를 위해 그가 선택한 와인은 총 세병. 홍콩에서는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500HKD(한화 약 7만5,000원)에 구매할 수 있지만, 그 와인이 한국으로 오게 되면 관세와 유통 마진 등이 더해져 가격도 달라질뿐 아니라 수입 과정도 까다롭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와인 세병을 모두 마셔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한국에 수입되고 있는 화이트 와인, 블랑 섹 드 쉬드로(Blanc Sec de Suduiraut, 2017 빈티지)를 별도로 준비했다.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와인을 준비했다면 이번에는 그와 어울리는 음식 메뉴를 정할 일이다. 가장 먼저 떠올린 메뉴는 지친 영혼을 달래는 수프, 프렌치 어니언 수프다. 양파를 잘게 채썰어 캐러멜라이징한 다음 닭육수와 함께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여낸 따뜻한 수프. 프랑스인들의 주식 빵, 바게트 빵 한 조각을 올리고 그 위에 그뤼에르 치즈를 곱게 갈아주면 완성이다.
보르도 와인 클래스를 선택하는 바람에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떠올렸지만, 그보다는 본격적인 와인 시음에 앞서 분명 속을 편안하게 해줄 메뉴라는 확신이 들었다. 블랑 섹 드 쉬드로 와인은 세미용(52%)과 소비뇽 블랑(48%)을 블랜딩한 와인. 해산물과 잘 어울린다는 정보를 찾고는 바지락 술찜 파스타와 하몽, 절인 토마토를 얹은 간단한 핑거푸드를 준비했다. 마셔보니 생선구이나 회, 관자 요리와도 곧잘 어울리는 와인이었다.
이제는 제임스 서클링을 테이블로 데려올 차례다. 노트북을 꺼내 홍콩 와인&다인 페스티벌 홈페이지 또는 (없는 것 빼곤 없다는)유튜브에 업로드된 온라인 마스터 클래스 영상을 켜면 모든 준비는 끝난 셈이다.
제임스 서클링과 근사한 테이블
약 35분짜리 영상 속 제임스 서클링은 보르도 와인을 소개하기로 한 배경부터 운을 띄웠다. 제임스는 보르도 와인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가 영국 등 유럽이 아닌 홍콩이고, 홍콩의 20~30대 젊은 층이 보르도의 새로운 와인을 시도하는 데 적극적인 트렌드를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과거 보르도는 전통적인 와인 생산지로 높은 퀄리티의 비싼 와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그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요즘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가성비 좋은 와인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고도 말했다. 게다가 홍콩의 수많은 맛있는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재미는 얼마나 쏠쏠할까. 그의 얼굴에도 흥분된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제임스 서클링은 지금까지 약 22만5,000개의 와인을 맛봤다고 했다. 지난해에만 맛본 와인이 2만5,000개 이상인 전문가다. 우리는 제임스의 말과 손짓에 따라 와인을 함께 음미했다. 블랑 섹 드 쉬드로는 레몬색을 띄었다. 제임스는 깨끗하고 상큼한 시트러스와 망고, 돌을 말했고 나는 그 향을 찾기 위해 후각을 곤두세웠다. 후배는 이끼 향을 맡았다고도 말했다. 와인 한 잔에 담긴 여러 가지 향과 맛을 찾아내는 일은 와인을 마시는 또 하나의 재미이기도 하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우린 제임스 서클링이 아니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안에는 스트레스도 무언의 압박도 없다. 즐기면 그만일뿐이다.
우리는 영상 속 사람들과 여러 번 잔을 부딪치고, 그동안 몰랐던 이야기에 놀라기도 하며, 종종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서클링은 평범했던 우리의 테이블을 한층 근사하게 만들었다. 물론 수 백 가지의 와인을 눈앞에서 골라 마시는 현장의 재미를 따라갈 순 없겠지만 말이다. 부디 내년에는 빅토리아 하버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길, 그리고 홍콩에서 와인을 ‘직구’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홍콩 와인&다인 페스티벌(온라인)
기간 | 2020년 11월11일~12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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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asterclasses.discoverhongkong.com/eng/
손고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