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철학자는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남는다. 21세기까지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19세기의 철학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카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리고 찰스 다윈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지”를 밝히려 했다. 프로이트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무의식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다윈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밝혀냈다.
그가 1859년 출간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말이 되는 설명을 제시한 최초의 책이었으며, 다윈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유래를 그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청춘의 독서, 유시민
출간된 지 160년이 넘은 ‘종의 기원’ 그리고 찰스 다윈에 대한 평이다. 유시민 작가는 위의 책에서 '같은 세기를 살았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철학이 시간의 무게 아래서 지속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것과 비교해 실로 경이로운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사이언스 북스에서 출판한 종의 기원 서문에는 지난 1,000년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물었던 ‘1,000 years, 1,000 people’이라는 조사에서 다윈은 7위를 차지했다는 소개도 등장한다.
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에서 찰스 다윈에 대해 아래와 같이 극찬한다.
지구의 생물체는 자신들 중의 하나가 진실을 밝혀내기 전까지 30억 년 동안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진실을 밝힌 그의 이름은 찰스 다윈 (Charles Darwin이었다. 공정하게 말하면 몇몇 다른 사람들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조리 있게 설명을 종합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었다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사실 이런 소개들이 입이 아플 정도로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종의 기원’이나 ‘찰스 다윈’에 대해 모르는 분은 당연히 없겠으나.. 도대체 왜 그렇게 대단한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진화론’은 다윈이 최초로 주장한 것도 아니며, ‘종의 기원’ 초판에는 ‘진화(evolution)’라는 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적자생존’이라는 말 역시 다윈이 사용한 것이 아니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표현을 썼을 뿐이다. (최근에는 '진화'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므로 ‘자연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하지만, (대체로)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다윈이나 진화론을 배척하는 일은 지금도 여전히 만만치 않게 발생한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자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실현된 적도 있고),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되는 데에 가장 큰 결격 사유는 ‘무신론자’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종의 기원’은 무려 656쪽에 달하고(사이언스북스 기준), 당시 이 책의 내용은 워낙 파격적인지라, 조심스레 돌려 말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 어떻게든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 다양한 논거들로 채워져 있는데.. 다시 이를 여기에 옮기기보다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해한 바를 토대로 적어볼까 한다.
'종의 기원'에 대한 이해와 문제 제기.
책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일단 ‘종의 기원’에 대해 간단히 (아주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면...
흔히 ‘다윈’과 ‘종의 기원’하면 ‘갈라파고스’를 세트로 떠올리지만, 이 책에서는 '비둘기'에 대한 얘기가 더 중요하게 등장한다. 19세기 영국에서는 ‘비둘기’나 ‘개’의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것이 사회적으로 꽤 유행했다고.. 출판 업자가 종의 기원 초고를 보고, 그냥 비둘기 얘기로만 출판해보는 게 어떠냐 권했을 정도니까. 다윈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또는 충격에 대비하도록 하기 위해) 친숙한 비둘기 얘기를 꺼낸 듯하다.
당시 전문 사육사들은 지속적인 교배를 통해 비둘기들을 개량시켰다는데.. 종의 기원 1장에서 어느 비둘기는 어떻게 교배되어 어떤 특징이 나타났고, 이러한 특징은 어떻게 대물림되는지를 자세히 밝힌다. 특히 실력 있는 사육사들은 어느 정도 원하는 품종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자신하는데.. 다윈은 이를 ‘인위 선택’이라고 부르며, 인위적으로 이러한 변종의 등장이 가능하다면, 자연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바로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만일 어떤 개체들에게 유용한 변이들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로 인해 그 개체들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을 좋은 기회를 가질 것이 분명하다. 또한 대물림의 강력한 원리를 통해 그것들은 유사한 특징을 가진 자손들을 생산할 것이다. 나는 이런 보존의 원리를 간략히 자연선택이라고 불렀다.
종의 기원, 찰스 다윈 (사이언스북스)
핵심은 ‘변이’의 발생 이후 더 적합한 변이에 대한 ‘자연선택’이 발생하며, 이러한 선택이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는 이러한 과정의 무한....... 반복이다. 다윈은 이를 토대로‘모든 종들이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불온한) 추론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발생될 수 있는 의문(또는 비판)은 첫째, ‘복잡성’의 문제다. 자연에 의해 ‘우연히' 진행된 선택치고는 너무나도 정교하지 않은가?하는 문제다. 특히 ‘눈(eye)’의 경우 너무나 정밀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져서 다윈도 설명을 포기한다. 종의 기원에서도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한다’고 토로할 정도니까.. 이러한 복잡성의 문제는 이른바 ‘지적설계론(Intelligent Design) 1)’의 공격을 받게 되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과정의 생략’에 대한 것이다. 만약 그렇게 서서히 ‘변이’와 ‘선택’이 이루어졌다면, 그 중간 과정이 (화석 또는 다른 흔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 우리는 그런 과정의 증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는가? 하는 비판이다. 이는 다윈 이전에 이미 있어왔던 ‘도약 진화론(Saltationist) 2)’이 등장한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지구의 회전을 느낄 수 없다고, 지동설을 배척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윈이 ‘자연선택’을 주장하게 된 확신의 '원천’은 무엇일까? 해답은 ‘Grandeur’라는 단어에 있다고 본다. (자동차 이름에 들어가는 그 단어) 바로 이 단어가 다윈에 반대했던 이들과 다윈의 가장 큰 차이점이며 오늘날 다윈을 위대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1) 지적설계론 : 대표적으로 시계공 논증이란 것이 있습니다. 들판에서 시계를 보았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만든 '존재'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자연에서도, 특히나 단순하지 않은 고도의 생명체나 기관이라면, 당연히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히 '창조주'가 그 지적인 존재였지만, 최근에는 '외계인'으로 상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영화 '프로메테우스' 같은..) 2) 도약 진화론 : 종 간의 불연속성, 즉 중간 단계가 발견되지 않는, 문제 보완하기 위한 이론으로, 변이가 중간 단계 없이 도약적으로 갑자기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즉, '증거 없음'이 '증거'인 이론이죠.
'다윈'은 무엇이 다른가?
다윈에 대해 비판하는, 주로 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이런 비판에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다. 인간이 어설픈 능력으로 신의 권능을 모욕하려 한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여전히 ‘진화론’과 ‘창조론’에 사이의 논쟁을 보면 다윈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에 공격하는 글들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의 지식으로 무려 160년 전의 책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이 온당할까? (만약 정말 자신이 있다면 도킨스 같은 사람과 맞짱을 떠야..) 다윈의 주장은 그 자체로 완결 무결하기 때문에 칭송받는 것이 아니며, 이 책의 주장은 신을 모독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연과 생명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윈을 진화론자 정도로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Naturalist' (흔히 박물학자라고 번역하는데, 자연학자나, 자연주의자라는 번역도 종종 등장) 라 밝힌다. 과학 (의학, 건축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분야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역사가 깊지 않아서 대략 19세기나 되어야 현재의 토대가 어느 정도 마련됐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Naturalist는 다양한 표본(화석, 광물, 동식물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지질학, 식물학, 동물학 등이 포괄되는 개념이다.
다윈은 특히 지질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지구의 '나이'에 대해 유추를 했는데, 아래의 글을 보면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지구의 역사가 적어도 500만 년은 될 것이고, 어쩌면 수천만 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영국 남부에서 켄트 주, 서리 주, 서식스에 이르는 윌드 지역의 지질학적 변화가 무려 306,662,400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했던 주장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다윈'이나 '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는(긍정적으로) 글들을 보면 대개 '장엄함'이라는 표현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Grandeur'를 우리말로 옮겨 놓은 말이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종의 기원' 제일 마지막 부분을 보자.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넣어 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종의 기원, 찰스 다윈 (사이언스북스)
위에서 인용한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서 '빌 브라이슨'이 언급했듯, 당시의 학계가 유추했던 수준과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 '자연선택'에 대한 당위성을 만들어 준다. 다윈이 주장하는 핵심은 자신이 엄청난 생명과 자연의 신비를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신만이 할 수 있다는, 자연과 시간의 위대함을 무시하는 그 오만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둘 다 생명과 자연의 '장엄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다.
첫 번째로 '복잡성'의 문제에 대해서 역시 인간의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최종적인 결과만을 보고, 이런 결과물을 만들려면 거의 불가능한 확률에서만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눈'의 경우도 지금의 결과로 '완벽'하다는 것 역시 현재 우리의 기준일 뿐이다. 이에 대한 '빌 브라이슨'의 설명을 다시 보자.
그렇다면 그런 신기한 복잡성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쩌면 모든 것이 처음 보았을 때만큼 그렇게 신비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놀라울 정도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단백질의 경우를 살펴보자. 단백질의 조직화가 신기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조직화가 완전히 끝난 상태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백질 사슬 전부가 한꺼번에 조직화된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몇 개의 딸기 기호를 고정시켜놓는 경우처럼, 위대한 창조의 슬롯머신의 회전 바퀴 중에서 일부를 고정시켜두었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서, 단백질이 한순간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진화한 것이라면 어떨까?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두 번째 비판 요소인, '과정의 생략'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변종들이 등장하고, 기존의 변종을 대체해 왔다면 왜 그 중간 과정은 발견할 수 없느냐는 지적이다. 이 역시 엄청난 시간의 변화 중에 극히 미약할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전부라 믿는 오류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또 찾아낸 화석 등의 증거는 장엄한 시간의 흐름 속에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암석층이나 모든 지층은 그와 같은 중간 연결 고리고 가득 차 있지 않는 것일까? 지질학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유기체의 사실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것은 내 이론에 맞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하고 가장 심각한 반박일 것이다. 그에 대한 해명은 바로, 지질학적 기록이 극도로 불완전하다는 것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종의 기원, 찰스 다윈 (사이언스북스)
지금까지 지구에서 존재했던 생물종(변이 중인 것이 아닌)이 3,000억 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화석으로 남아 있는 생물은 그중 25만 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가 보고 있는 '진화'의 과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헐적인 것인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대략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다윈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를 급하게 낸 '요약본'이라 쓰고 있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 무려 650페이지에 달하는 요약본인 셈이다. 처음에 읽으면서는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지면 관계 상'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다느니, 추후에 다른 책에서 이야기 하겠다느니 하는 말이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엄청난 시간의 장엄함을 조금이나마 목격한 다윈의 입장에서 보면 이를 혼자 힘으로 기록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시도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번 글에선 특히 '인용'이 많았지만, 다윈에 대해 여전히 불편해하거나 애써 무시하는 시각들이 존재하므로 조금이나마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다양한 견해들을 빌어온 것이다. 그럼에도 다윈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면 19세기, 영국의 어느 시골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이 놀라운 통찰력으로 오늘날의 다양한 과학 분야에 불씨가 되어준 것 자체로 큰 의미를 삼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