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던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답한다면, 물론 훌륭하지만 이는 시험 암기용 수준이다. 적어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상식의 수준에서 고전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주는 진정한 지혜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노인과 바다’를 한 시골 어부의 시시껄렁한 무용담 정도로 요약한다면 제대로 책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책이지만, 막상 읽어보기는 쉽지 않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내용들, 이 책이 왜 위대한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함께 공유해보고자 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는 E.H.Carr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우리가 대학에서 개론 강의를 듣게 되면 '경영이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듯, 이 책도 영국의 '역사학도'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이 책의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Carr가 이 책에서 강조한("저자의 이름 외에도 출간일이나 집필 일자 - 그것은 때때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누설한다 - 도 살펴봐야 한다")대로 우린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와 이 책의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Carr가 강의를 하고 있는 시기(1960년대, 영국)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간 때이며, '아시아(정확히는 일본)'의 부상을 겪은 때이다. '역사의 주도권'이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처음 유럽의 밖으로 나간 것이자(물론 이는 유럽인들의 착각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 대륙을 건너간 때이기도 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동안에는, 영국의 역사가들에게 역사는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자, 역사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이단이 되어버렸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빅토리아 시대까지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또한 역사는 지속적으로 진보한다고 믿어 왔다. 그것이 꼭 어떤 종착지(기독교적인 '천년왕국'이든,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든, 아니면 완전무결한 자본주의 사회든)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역사는 역사가 개인의 것으로 맡겨 두고, 역사가는 역사를 '사실(事實)' 대로 기록하기만 하면 된다는 기존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승자가 아닌 입장이 됐다면(꼭 ‘패자’는 아니더라도) '사실의 기록'이란 것의 진실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과연 '사실'이란 것은 무엇이고, 사실대로 기록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한 걸까?
'신채호'와 그의 사실(事實)
'사실'에 대해 좀 더 살펴 보기 위해 우린 '랑케'와 '신채호'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 한다. '랑케'는 역사가의 임무란 '그것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이른바 '실증주의'이며 '실증사관'으로 이어져 온다. 하지만 Carr는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라'며 이를 비판한다. 필요조건이지만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Carr가 생각하는 역사가의 임무란 무엇일까?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The Historian and his facts. '그'의 사실들이다. 'Her'가 아닌 'His'라 칭하긴 했지만, 성별보다는 '개인'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에서 '역사가' 역시 각 개인의 관점에서 '사실'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선택한 사실'들이 '역사적 사실'이 된다고 말한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이야기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순서나 전후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여기서 또 한명의 인물 '신채호'를 생각해 보자.
단재 신채호는 일제에 패망한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우리 역사를 연구하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로 고대사에 주목했으며,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칭했다. 김부식이 묘청을 진압하면서, 사대주의가 우리의 역사관에 파고들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 패망의 기원을 '묘청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단재의 주장, 바로 그의 사실들(his facts)은 상당수가 역사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논쟁적이다. (자금 우린 묘청의 난이 지난 1천년 내 가장 중요한 사건이란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의 민족주의적 사관이 독립운동가로서는 존경받지만, 역사학자로서는 객관성은 상실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은 한 학술회의장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한국 역사계에 실증 사관이 지배적이라서일 수도 있겠고, 또 반대편 주장처럼 여전히 남아 있는 '식민사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단재의 ‘사실들’이 주류가 됐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역사관을 가졌을 수 있다. (이덕일이라는 분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여기선 논외로 하자)
단재의 경우처럼 역사가는 그 시대의 그리고 그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 속에 살았던 단재와 달리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엔 또 이영훈 같은 사람도, 하버드 대학의 램지어 같은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사실을 ‘왜곡’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필요에 따라 사실을 ‘선택’한 것일까?
역사가가 사실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현재의 역사가는 과거의 역사가가 집필한 사료들을 통해 역사를 볼 수밖에 없으며, 과거의 역사가는 어떤 관점에서 작성을 했을지, 그리고 현재는 또 어떻게 역사를 풀어나갈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1장의 마지막에서 그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실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반사적으로 우리는 바로 이 문장, '역사는 .. 현재와 과거 사실의 끊임없는 대화'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인이 아닌 '역사가'를 위한 강의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앞 문장과 다시 이어서 보면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인 것이다. 즉 역사가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이며,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화된 정의는 아니다.
그럼 일반 대중에게 있어 '역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Carr는 위의 문장에서 '과거와 현재'라고 표현했지만, 이 책의 뒤에서 '과거와 미래의 목적 사이의 대화'라 덧붙인다. 역사가(historian)는 그의 사실들을 선택할 때, 미래의 목적에 맞는, 즉 대중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사실을 선택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인 것이며, 역사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를 고민하고 이를 위한 사실들을 선택하는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Carr의 정확한 입장일 것이다. 따라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식의 우연적 인과 관계는 역사가가 선택할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팩트는 신성하며, 의견은 자유롭다' 는 말이 오늘날 '의견은 자유롭지만 팩트는 신성하다' 는 말로 바뀌어서('팩트'가 강조되어) 인용될 만큼, 미래가 아닌 자신의 또는 정파적 이익을 위해, 자긴의 의견을 위해 팩트를 흔들어 버리는 일에 부끄러움이 사라진 지금, 역사.. 아니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87’과 익명의 개인들.
영화 ‘1987’을 보면 거대한 역사의 물결이 '박종철'이라는 한 대학생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지만, 원래 박종철이라는 개인의 죽음은 '사실'이되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박종철의 죽음을 역사적 사실로 끌어올린 것은 '익명의 대중'들이다. 비록 우리가 그 대중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중요성이 사라지진 않는다.
역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지도 않으며 전투를 벌이지도 않는다.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즉 현실의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E.H. Carr 에서 재인용.
이는 마르크스의 말이다. 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수천 명이 있는 곳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바로 여기에 일반 대중에 있어서의 '역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있다. 전체주의를 꿈꾸는 독재자의 눈에 '대중' 즉 '익명의 개인들'이 스스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처럼 섬뜩한 일은 없다. 역사를 논하는 인문학 책이 왜 위험한 금서의 반열에 올랐는지 (영화 변호인에 등장한 그 불온서적이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며, 또한 그 엄혹한 시절 이 책에 뜨겁게 반응한 청춘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익명의 대중에 대한 Carr의 주장은, 역사가에게 과거의 사실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의도가 컸겠지만, 억압받고 있는 익명의 개인들에게는 우리도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우리의 현대사로 바꿔 보면 박정희나, 이승만이나, 또는 김대중이나 노무현 개인의 역사가 아닌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치는 때가 있다. 그 진실한 절규를 모으는 게 바로 역사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조세희.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탓이겠지만, 익명의 개인(또는 난장이)들에 의해 역사가 만들어져 갈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험한 우리는 엄청난 역사적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시민 케인'이라는 고전 영화가 있다. 아마도 요즘엔 이 영화를 본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지금은 몰라도 얼마 전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1~2위에 자리했다. 1940년대 작품인 이 영화는 왜 아직도 위대한 영화로 남아 있을까?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 않냐고? 대학 시절 이 영화를 봤지만 난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은퇴한 아마존 설립자 '제프 베조스'는 '혁신이 너무나 일상화돼서 하품이 나오는 것은 혁신가에게 최고의 칭찬' 이라는 말을 했다는데, 여기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겠다. ‘시민 케인'이나 '역사란 무엇인가'의 위대함은 우리에게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일상화된 혁신'을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집합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지금, 이 책이 이야기하는 일부의 내용들은 이미 우리에게 진부한 사실이 되어 버렸지만, '역사'와 '사실'이라는 것이 위태로운 곡예를 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춰보면 또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