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터라면서 웬 인문학인가? 싶은 분들이 계실까 싶어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원래 이 브런치의 시작은 '인문학'과 '마케팅'을 접목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마케팅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인문학이 메꿔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거든요. (사실 잡스 형이 그렇다고 하길래..)
그래서 이 채널에도 처음엔 인문학(주로 제가 읽었던 인문학 책 리뷰)과 마케팅 관련된 내용을 함께 올렸는데요. 욕심과 달리 각각의 글을 개별적으로 올리다 보니 채널 성격만 모호해지더군요. 그래서 과감히 인문학 관련 글(정확히는 인문학 독서 일기였던)은 접고, 이미 올라와 있던 글도 대부분 발행 취소를 하고 마케팅 글만 남겼습니다.
돌이켜 보면 인문학과 마케팅의 접점을 찾지 못한 것은 제 역량 부족(특히 인문학에 대한) 탓이 큽니다. 욕심에 비해 실력이 미치지 못한 거죠. 꽤 시간이 지나서 지금은 왜 인문학이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를 했다고 판단해서 앞으로 관련된 글도 써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냥 인문학이 아니라 '마케터의 인문학'이죠..
왜 인문학이 필요해졌을까?를 보려면 먼저 지금의 시대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엔 모든 것이 명확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신'이 정해주던 시대가 있었고,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또 먹고살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던 때도 있었죠.
마케팅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제품이 더 좋은 지 명확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CES에서는 누가 몇 인치짜리 TV를 내놓았나, 몇 리터 용량 냉장고가 나왔나를 놓고 경쟁했죠. 만약 지금 더 큰 TV, 더 큰 냉장고라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중국산을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소비자로서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내가 보는 것과 나를 누가 보는가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이 어차피 몇 안 되는 TV 채널이다 보니 선택의 기준이 명확했습니다. 광고 많이 하는 것이 좋은 제품이었죠.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하다 보니 평가도 용이합니다. 기존의 산업화 시대에서 우리의 가치는 '잘'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부터 '잘 만든 제품' '참 잘했어요' 같은 게 통했죠.
그럼 '잘'이 의미하는 건 뭔가요? 개인차원에서 보면 좋은 대학 가고, 대기업에 입사해서 결혼 잘하고.. 등 인생의 항로 같은 것이 정해져 있었죠. 회사라면 제품 잘 만들어서 많이 팔고, 그렇게 돈을 벌어서 TV 광고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선순환이죠.
'경로'가 정해져 있으니 Input만 늘리면 Output도 함께 늘어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는 입사하자마자 퇴사가 목표가 되고, 결혼이나 출산은 옵션이 됐습니다. 잘 만든 제품은 넘쳐 나고, 소비자들은 예쁜(또는 예쁘지도 않은) 쓰레기를 삽니다.
길이 모호해지니 Input을 투입하는 게 맞는지도 모호합니다. 무엇이 '잘'하는 것인지 헷갈립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시대를 잘 설명하는 글이 있어 인용해 보겠습니다.
명왕성 퇴출 논쟁이 크게 흔들어놓은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과학의 객관성에 대한 논란이다. IAU는 2006년 총회에서 명왕성을 행성의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안을 놓고 투표를 했고, 그 결과에 기초하여 최종 결정을 내렸다. 객관적 사실이 생명인 과학에 투표가 웬 말인가?
프레임 | 최인철
긴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모호해진 시대는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자유로부터의 도피)처럼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인간을 억압해온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자유의 대가는 꽤 크죠. 정해진 것이 없으니, 스스로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또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남들은 어떻게 방향을 정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구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럴 땐 뭐가 국룰인지?' 같은 걸 찾게 되고,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무슨 세대가 어떻다던가, 아니면 MBTI 같은 것에 의존합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지 않은 시대가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 않은 길을 가길 두려워하죠.
그래서 스스로를 '군집화' 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 하고,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 통해 거울로 삼습니다.
대니얼 웨그너라는 심리학자는 '분산 기억(transactive memory)'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가족이나 친구라면 내가 일부만 기억하고 있는 것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다는 거죠. 반면 이혼을 한다던가, 이성 친구와 헤어지는 상황이 된다면 나의 일부를 함께 잃어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친구나 가족이 아닌 나의 '코호트(cohort)'에 이 기억을 분산시켜 놓습니다. 그로스 해킹을 공부하셨다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우리(마케터)가 소비자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설정한 유사 행동 집단이 '코호트'죠.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스스로 코호트를 설정합니다.
코호트(cohort ): 일정한 기간에 태어나거나 결혼을 한 사람들의 집단과 같이 통계상의 인자(因子)를 공유하는 집단.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은 나,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나, 퇴사 준비를 하는 나, 이런 다양한 자아(부캐? 멀티 페르소나?)를 어떤 알고리즘이나 코호트에 연결해 두고 내가 살고 싶은 오늘(혹은 미래)을 봅니다. 일종의 수정구슬(또는 거울?) 같은 거죠.
여러분도 일반 개인의 입장에서 코호트 몇 개쯤은 설정해 두고 있지 않나요? 저는 요즘 트렌드를 알기 위해 구독해둔 뉴스레터들이 있고, 독서하는 습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독서모임 몇 곳에 가입해 있습니다. 게을러서 잘 들어가진 않지만 그래도 언젠간 보리라는 생각으로 홈트 관련 앱도 받아 놓았고요.
보통 이런 코호트들은 그날의 기분에 의해 언제든 들어갈 수 있고, 또 언제든 쉽게(비교적) 해지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로 만들어주는 데는 도움을 줘야 하지만, 너무 심한 구속은 사양이죠.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것도 알겠고, 그래서 각자 코호트를 설정하고 내 자아를 분산시켜 놓는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인문학과, 아니 마케팅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까? 오히려 빅데이터 분석 같은 것으로 무엇이 유행인지, 그리고 소비자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을 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같이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물로 그게 맞습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아마존이나 구글처럼 이런 것을 하기에 충분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설령 빅데이터를 분석한다는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데이터 자체가 결론을 내려주진 않습니다.
특히, 작은 브랜드라면 취해야 할 방법은 일반적인 소비자들의 선택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브랜드)는 누구인가? (때로는 누구여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코호트와 함께 하는 것이 맞을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같은 건 결국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마케팅 같은 실용학문은 주로 'How to'를 다루지만, 인문학은 'What'과 'Why'를 탐구하죠.
정해진 길이 없는 시대, 나 스스로 길을 찾고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대에는 인문학이 도움이 됩니다. AI와 로봇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결국 사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앞으로 인문학을 활용해서 어떻게 인간을, 그리고 시장을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살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