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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Apr 10. 2020

피로사회, 한병철

과잉이 부른 신경증적 질병의 사회

사실 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으나 리뷰는 미뤄 두었습니다. 도저히 한 번만 읽고 리뷰를 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도 있고, 근래 책들을 좀 많이 읽으면서 부작용 (내 글 쓰기의 두려움?) 같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무언가 남기지 않으면 다 잊혀 버릴 것 같아 대략 끄적거려 볼까 합니다.


<피로사회>는 굉장히 얇은 책이지만 '깊은 고민'이 수반되어야 그나마 조금 저자가 하려는 말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자 핵심 개념이 될 '피로사회'라는 것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그만큼 '피로'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단어지만, 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죠. 




1. 면역학적 패러다임에서 신경성 폭력의 시대로...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
...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피로사회 | 한병철 


피로사회의 첫 문장입니다. 첫 장인 ‘신경성 폭력’에서는 현시대에 대한 진단에서 시작합니다. 과거(규율 사회)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와 같은 이질적인 것들을 방어하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의 시대라면, 현대 (성과사회)는 긍정성의 과잉인 시대가 되었다고 정의합니다.(저자는 성과주의에서의 긍정성을 "Yes, We Can"으로 상징시킵니다) 따라서 현시대의 고유한 질병은 타자성, 이질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이 틀리면 답도 틀리기 마련이니까요..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 사회에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 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피로사회 | 한병철 


여기에서 긍정성의 과잉과 신경증적인 연계가 좀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저자의 말대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규율 안에서 조종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이죠.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착각’을 동반하여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는 여기서 편의점이나 치킨집으로 대표되는 자영업자나, 이른바 Gig Econony가 떠올랐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긍정의 과잉이 스스로에 대한 무한 착취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자살을 하는 연예인들에게나, 힘들어하는 청춘들에게 'Latte is horse (나 때는 말이야...)' 나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식의 말로는 결코 위로될 수 없죠.  




2. 깊은 심심함..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과 정보에 대한 과잉(hyperattention)으로 표출됩니다. 저자는 멀티태스킹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퇴화라고 주장합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피로사회 | 한병철 


철학적 관점에서 '분주함' 또는 '조급함' 등의 표현은 어떠한 여유를 갖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여유 없음은 허무를 낳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태를 무젤만 (나치 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에 비유하죠. 일종의 '좀비' 같은 상태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전반적인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피로사회 | 한병철 


긍정 사회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남겨두고, 무언가를 하지 않을,, 부정적 힘은 축소시킵니다. 이러한 부정적 힘이 약화된다면 우리는 더 빨리 앞으로 걸어 나갈 뿐, 무언가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여유는 갖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위' 즉 '깊은 심심함'이지 않을까 싶네요. 한나 아렌트가 인용한 대로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해야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라는 역설적인 말이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3. 피로 사회 : 근본적 피로의 필요.


긍정성의 극대화는 우리를 무목적적인 (서사성이 없는) 기계화로 이끌어 갑니다.


성과 사회, 활동 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피로사회 | 한병철


한병철은 이러한 상태의 해결책으로 한트케의 '근본적 피로 (눈 밝은 피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탈진)가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무위)의 세계일 것입니다. 이러한 무위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피로 상태는 과잉 주의가 아닌 느린 형식의 주의가 가능해집니다. 이로써 새로운 영감을 얻는 피로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피로를 가지고 말장난하는 말들의 잔치인 듯싶긴 한데... 저는 과로로 인한 탈진과, 힘들게 등산을 한 후 정상에서 맛보는 고단한 휴식과의 차이 정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4. 생각과 느낌


책을 읽은 느낌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면... 


책을 읽으면서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칠 만큼 인사이트 있는, 생각해볼 만한 요소를 가진 내용이 많았지만, 상당수의 내용이 다른 철학자들에 대한 인용과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여기서 인용한 베냐민,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 한트케 등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해가 있다면 이 책은 좀 더 다르게 읽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혹여라도 그런 때가 온다면 이 책은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저자는 면역학적 패러다임 (바이러스)의 시대는 지나간 것으로 치부하는 듯한 느낌이 있는데, 요즘의 상황을 보면 아직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엔 성급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여튼, 어디 가서 책 좀 읽는다고 하면 이야기하기 딱 좋은 책이지만.. 무슨 내용인지 요약하기에도 쉽지 않은, 그럼에도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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