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프로 Apr 11. 2020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로다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경고

이 책의 영어 제목인 “To Have or To Be?”는 참 쉬운 단어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찍부터 영어를 배우는 요즘이라면 아마 유치원 수준만 돼도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쉬운 단어들의 조합인 이 책은 꽤 깊은 인간적, 인류적 고민을 제시합니다. 특히 ‘소유’보다는 ‘존재’에 대한 이해에 더 어려움이 있는데, 생각하다 보니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개인적 기준으로) 할 수 있는 두 개의 'Be'가 함께 떠오릅니다. 




Hamlet과 The Beatles의 'Be'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누구나 알고 있는 햄릿의 유명한 대사죠. 우리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소유냐 존재냐’에서의 ‘To Be'에 대입해 생각해 보면, 이는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에 대한 갈등보다는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해석됩니다. 


'이 판국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냥 깔끔하게 죽어 버릴까'의 문제보다는 '기존의 나로 살 것인가' '다른 내가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지 않을까요?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To Be(가만히 있으면)하면 살 것이고, Not To Be 하면 죽는 길일 테니 마찬가지겠지만요..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 on m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 The Beatlles>


비틀즈 역시 ‘Be’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고.. Be는 결국 나 자신으로 남아 있는 상태로 봐야 할 듯 합니다. 영어를 배운다면 가장 먼저 나올 단어 'Be'가 갑자기 철학적인 의미처럼 다가오네요. 




왜 'To Be'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까?


위에서 에리히 프롬(이하 프롬)을 흉내 내어 말장난 같은 이야기들을 적었지만, 뭔가 깊은 사유를 동반하는 (다른 말로 뜬구름 잡는?) 책들을 읽을 때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내가 뭘 읽고 있지???가 헷갈립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공감하지 못하면, 문장 한줄 한줄은 그저 읽어낼 뿐, 납득이 도저히 되지 않아 진도를 못 뺄 때가 많죠. (이런 걸 난독증이라 하나?) 특히 이 책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기독교나 유대교, 선불교 등의 종교, 니체의 철학까지 약간의 이해를 요하는 내용들이 줄줄이 나오니 더 그렇습니다. 


일단 첫 번째 의문은 ‘소유’와 ‘존재’가 선택적 관계인가하는 건데, 이건 저자가 친절히 설명해줍니다. 하지만 두번째로 드는 의문. ‘왜' 소유 or 존재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읽을수록 모호합니다, 아껴야 잘 산다는 얘기일까?! 공수래공수거라는 얘기일까?! 그래서 반쯤 읽다가 해설서도 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봤는데. 프롬이 '소유적 양식'(To Have)에 문제 제기를 하려는 내용은 아래 문장에 있더군요.


올바른 삶이 윤리적, 종교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육체적 생존이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프롬은 현재의 우리가 차원이 다른 위기에 와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위기가 가까이 왔음에도 인류는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정확히는 트럼프)은 지구온난화는 헛소리라며 파리협약에서 박차고 나가버렸고. 세계의 공장 중국은 탄소 배출의 주범인 석탄의 사용을 줄이는데 경제적 이유로 주저합니다. 북한은 끝내 핵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고,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파국은 자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이 자초한 것들입니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비롯된 거죠.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모든 신들은 죽어버렸으니, 이제 인간은 스스로 ‘위버맨쉬’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겟돈'이든 '라그나로크’든 지구 종말이 온다면, 이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메시아'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정신'이라는 게 프롬의 주장입니다. 


프롬의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에 따른 위기감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정신'에 대한 또다른 책이 '사랑의 기술'이죠. 




존재적 실존 양식의 세계는 가능할까?


마지막 의문.. 존재적 실존양식이란 뭘까? 프롬은 다소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이야기들을 하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소유적 실존 양식을 갖지 않는 것이 곧 존재적 실존 양식이다'라는 겁니다다(???). 소유적 실존 양식이 '인류의 파국'을 일으킬 수 있는 만큼, 존재양식의 가치 보다는 소유양식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더 부각하죠.


프롬은 이러한 내용들을 토대로 좀 더 궁극적인(정치적인) 목적을 드러냅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지려면,
다시 말하면 병적 과소비로 산업을 추진 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한다.

<소유냐 존재냐 -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자본가)를 붕괴시키고 노동자 세상이 올 것으로 예언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가 버렸고.. 프롬은 자본주의의 한계성과 위기의 임박함을 알려 ‘소비자 혁명’을 하고자 합니다.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의 철학적 사유를 제기하는 것을 넘어 ‘소유적 실존주의’에 대한 ‘존재적 실존주의’의 계급투쟁을 추동하려합니다. 레닌의 소비에트(천박한 공산주의)가 아닌 수정된 사회주의를 꿈꾼 것 같은데, 필요성의 인식에 비해 그 실현 방법은 못찾은 것인지... 실현 방법은 다소 나이브(?)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실성은 약해 보입니다.


'소유냐 존재냐'를 발표된지 4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또 앞으로도 우리는 '사활이 걸린 문제'에 또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트럼프'나 '아베','시진핑''푸틴' 같은.. 시장적 성격의 화신과도 같은 정치인들이 욕심의 크기를 놓고 다투는 걸 지켜봐야하죠. 


에리히 프롬이 지금의 세계를 봤다면 뭐라 했을까요? 그래도 존재의 도시는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해줬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