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수업을 하면서 내 학원이든 교습소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니던 학원에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원장선생님이 당황해하면서 여러 가지 제안을 해왔다. 월급을 조금 올려주겠다.부터 시작해 나중엔 예고반 운영권을 맡기겠다. 그다음엔 그 학원을 인수해라 까지.....
당시 코로나 초기였고 규모가 있는 학원을 인수하라는 건 폭탄 돌리기나 마찬가지였다. 학원이 크면 지출이 많아지고 수강생 수가 줄면 마이너스 폭도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을 최저시급으로 고용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내게 그 학원은 너무 컸고 이미 너무 낡았었다. 그럼 거기서 계속 일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 원장님은 이미 지쳐있었고, 나와는 운영방침이 너무 맞지 않았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깜냥에 비해 규모를 키워 어수선해진 상태였다.
나는 원장님께 좀 매정하다 싶었지만, 중3 올라가는 입시생이 들어온 상태라 그 아이한테도 좀 미안했지만 그만뒀다. 사실 2년 동안 최저시급에 가까운 페이를 받고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원장님이 첫 입시를 치르고 아이들이 많아졌을 때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고 그때부터 정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나도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뭐든 할 수만 있다면 했지만 사람맘이 또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합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생각하면 상처받기 마련이다.
내가 나오고 그 학원에 소묘반은 없어졌다. 그 학원뿐 아니라 학교까지 코로나로 수업을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코로나가 잠잠해질 것을 기대하며 여기저기 장소를 알아봤다. 이게 설마 일 년 이상 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신도시 전문 상점가의 건물 4~5층은 예상보다 임대료가 쌌지만 관리비가 있었고 관리비 포함하면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사는 아파트 1층상가를 임대하기로 했다. 비탈길을 따라 쭉 늘어선 이 1층짜리 상가는 비탈 아래쪽 큰길에 가까울수록 임대료가 비쌌고 내가 얻은 위쪽은 저렴한 편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는 비탈진 면이었고 그 덕에 저렴했지만 바로 길건너편에 고등학교가 있었고 가게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어서 벽만 좀 손보면 그런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 만난 부동산 사장님이 나를 꼬박꼬박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가게 임대인까지 나를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이 원장님이란 말이 어색하기도 하고 나는 미술학원 말고 교습소 할 건데 원장이 아니잖아라며 굳이 원장님이라고 하는 게 적응이 안 됐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해도 좋을 텐데 이러면서 말이다.
2주 정도 매일 페인트칠을 하고 목공사 없이 쇼윈도 쪽에 그림을 걸기 위해 키 큰 수납장을 사서 뒷면에 그림을 걸 수 있도록 폼보드를 붙였다. 싱크대와 책상 등을 주문하고 벽에도 그림게시판을 만들었다. 아이들을 경험하면서 요즘아이들이 얼마나 더위와 추위에 민감한지를 알아서 냉난방기에는 특별히 신경을 썼다. 나에게 오는 아이들한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투자로 깨끗하고 쾌적한 공간을 만들려 했고 예상보다 비용은 조금 더 들었고, 그런대로 쓸만한 공간이 됐다.
교습소랑 학원의 차이도 뭔지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고 이걸 물어볼 데도 없었다. 인터넷 카페를 뒤져봤지만 미술교습소에 대한 정보는 드물고 학원체인광고가 대부분이었다.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져서 알아낸 최소한의 정보는 학원과 교습소는 규모의 차이도 있지만 교습소는 강사채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파트타임강사를 쓸 수는 있지만 시간제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면적에 비례해 학생수에 대한 제한이 있었다. 실사를 나와 직접 공간을 측정한 후 동시에 7명 이하의 수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것도 내 계획에 문제는 없었다.
2020년 이전에는 2종근린생활시설이면 학원이나 교습소 등록이 가능했는데, 건축물대장상 2종근린생활시설(학원)으로 시설변경을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집주인과 협의가 필요한다. 그리고 예상외로 나를 좌절시켰던 것은 수강료를 책정하는 것이다. 법규상 10분 단위의 수강료를 신고해야 한다. 대략 주 몇 회 수업에 얼마로 예상하고 있던 나는 교육청에 앉아서 이걸 일일이 계산해야 했다. 중3과 예비반을 구분해서....
교습소 허가를 받기 위해 교육청을 찾았는데, 거기서 하필 이전학원 원장님을 만나서 내가 교습소를 하는 걸 들켰다. 뭐 비밀은 아니었지만, 중학교 2학년 올라가는 아이를 하나 데려올 터여서 신경이 쓰였다. 내가 그만둔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 아이는 그사이에 미술학원을 쉬고 있는 상태였다. 3월이 시작되면서 광고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코로나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해 예고 1학년이 된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으로 입학식도 못하고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었다. 학교 실기수업을 못 받고 있는 상황이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세명의 아이들이 다시 내 교습소에 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주중 며칠이라도 손이 굳지 않을 만큼 그림을 그리자 했고 아이들은 숙제만 나오는 이상한 학교실기 과제를 교습소에 와서 했다. 그 아이들 덕분에 초기에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으며, 나는 한편으로 학교가 빨리 정상화되어 아이들이 제대로 대입준비를 시작하기를 바랐다. 생각보다 여러 아이들이 그 교습소를 오갔다. 코로나가 심해져 완전 락다운 되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명 이내로 수업할 수 있었다.
코로나 와중에도 초등 5학년 아이 두 명이 함께 다니고 싶다고 해서 주 1회 수업을 했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취미생도 주 1회 수업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다. 교통이 불편한 신도시, 대부분의 고등학생 입시생들은 시내에 입시학원 밀집지역까지 다니는 상황이라 예고반을 중심으로 운영하려 했는데 예고인원은 충족되지 않고 자꾸 고등 1~2학년이 왔다. 시내 학원을 다니던 아이들도 자신의 데생력에 한계를 느껴 소묘를 하고 싶다는 아이들이 오기도 했다. 물론 그 아이들이 길게 다니지 않는다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내가 요즘 대입미술을 가르치기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왔던 아이들은 그림의 기초를 탄탄하게 가르치는 내 수업에 만족하는 편이었고 그만둘 땐 기분 좋게 큰 학원에 가서 꼭 좋은 대학 가라고 말해줬다.
코로나는 생각보다 길었다. 1년 넘게 아이들은 학교에 제대로 가지 못했다. 내 교습소는 임대료 외에 별 지출이 없었던 덕분에 주 3~4일 수업으로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동산 계약기간인 2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집이 먼저 이사를 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운영해보지도 못했는데 교습소도 옮겨야 되겠다 싶었다. 오가기 멀었을 뿐 아니라, 다소 고립된 신도시가 아니라 좀 더 전통적인 학교들이 있는 이사한 지역에 새로 교습소를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