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할 수 있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40대가 되어 한국에 왔으니 나는 빨리 뭔가를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매일 구직사이트를 들어갔지만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대놓고 00세 이하라는 채용조건을 적어 놓은 곳도 많았다.
파트타임으로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마음먹었다.
우리가 귀국해 정착한 곳은 지방도시 인근의 신도시였다. 혼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아이는 미국에서 처럼 엄마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기를 바랐고 한두 달은 그렇게 해줬다.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간 학교 앞에 노란 버스가 끝없이 줄지어 있는 놀라운 광경을 마주했다. 아 역시 한국이구나. 이 동네에서 일을 하려면 어쩌면 학원을 노리는 게 제일 빠르겠다 싶었다. 그때 영어학원을 염두에 두고 영어점수를 따서 이력서를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고생 수업은 몰라도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수업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에서 유치원(우리가 지내던 지역의 공립학교는 고맙게도 prekindergaten이 있어서 2년을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에 다니는 아이와 함께 세사미스트릿과 실제 유치원영어를 시작으로 말문이 틔이기 시작했던 나다. 특히 우리 아이가 한글을 놀랍게 빨리 읽은 것을 경험 삼아 파닉스와 읽기를 놀이 삼아 가르쳤고 원어민 아이들보다 빨리 읽고 쓰게 됐다. 물론 미국에 살다 온 것만으로 영어학원 선생님이 거저 되진 않겠지만 그때 난 뭐든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선 영어시험을 볼까 하다가 우선 운전면허시험을 다시 보기로 했다. 나는 운전과 참 인연이 없었다. 경기도에 살던 결혼 전에는 학교나 회사가 너무 멀어서 운전으로 다닐 엄두도 못 냈다. 술을 즐긴 것도 한몫했지만.... 미국에서도 3년이 지나서야 안 되겠다 싶어서 면허를 땄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미션처럼 취득한 드라이브 라이선스가 애석하게도 한국에 오니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있던 위스콘신주에 2년 동안 임시면허가 주어지고 2년 후에 영구면허가 나오는데, 한국에 오니 임시면허는 한국운전면허로 교환이 안된다는 거다. 그래서 그냥 다시 땄다. 쓸데없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영어시험을 치고, 운전면허를 따고, 매일 운동을 하면서도 하면서도 늘 마음 한국석엔 하고 싶은 일을 외면하고 있는 허전함이 있었다. 이제 그림을 다시 그릴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입시미술을 했고 서울에서 예고를 나왔다. 좋은 학교의 디자인과를 가려했는데, 재수까지 해서 도예과를 갔다. 도예과가 나한테 여러 가지 새로운 기회와 길을 제시했지만 나는 계속 그림 그리는 일이 아쉬웠다. 지나고 생각하니 애초에 디자인과가 아닌 회화과를 준비했어야 했다. 뭔가 다시 시작해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과 별개로 너무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틈나는 대로 그림을 조금씩 끄적이기 시작했지만 마음대로 안 됐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지도 20여 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동안 아이한테 뽀로로와 친구들을 그려주거나 공주님 그림을 그려 잘난척한 것 외엔 딱히 그림을 그린적이 없었다. 20여년만에 뭔가를 끄적이다 보니 말을 듣지 않는 손이 짜증 났다.
일을 하고 싶어서 국비지원교육도 알아보고 그를 위한 직업상담 같은 것도 받았다. 이미 나는 내가 소질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알지만 긴 문답과 상담 끝에 디자이너나 예술 쪽의 직업이 잘 맞는다는 뻔한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디자인 쪽 일을 배워서 신입으로 취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고 회사에 다니려면 차라리 경리회계를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물론 어느 일자리든 어리숙한 40대 신입사원을 환영해 줄 리도 없다. 그러다 우연히 동네 미술학원에서 수채화와 소묘가 가능한 선생님을 구한다는 공고를 봤다. 대단한 일자리는 아니었지만 심혈을 기울여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서 보냈다. 입시학원은 아닌데 예고준비생들이 조금 있는 규모가 좀 있는 아동미술학원이었다.
이력서를 내고 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푸근한 원장선생님이 그저 당장 소묘수업을 할 선생님이면 된다는 듯이 오케이 했다. 물론 강사료가 최저 시금인 것에 한번 놀랬고, 내 그림을 전혀 검증하고 채용한 것에 다시 놀랬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문득 걱정이 돼서 소묘를 했다. 정말 아득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중고등학생 내내 5년을 지겹도록 그린 연필소묘는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1시부터 5시까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9시까지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나는 사실 어린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것에 회의적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들만 그리면 되지 굳이 그림을 잘 그리게 하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들도 스킬을 가르치기보다 자유롭게 그리는데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5학년 이상,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어느 정도 인내심을 갖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이에 수업을 듣는 게 좋다.
이 미술학원의 초등부 수업은 그야말로 야생이었다. 학생들은 텀을 두고 2시 클래스 3시 클래스 이렇게 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시간이 될 때, 다른 학원 가기 전에, 아무 때나 수시로 들락거렸다. 초등1학년부터 6학년까지 뒤섞여 있는 교실 안은 누구에게도 집중하기 어려웠고, 수업이 끝나고 다른 학원에 가기 전 시간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공용공간을 뛰어다니고 숨바꼭질을 하고 떠들어댔다. 특히 4시~6시는 정말 카오스 그 자체여서 중학생수업을 하기 전 진이 빠졌다. 원장선생님은 내가 그 아이들을 통제하기를 바랐지만, 오늘 그려야 할 그림을 해치우고 놀겠다는 아이들을 붙잡아둘 방법은 없었다. 많은 아이들이 미술학원에 놀러 왔고 이미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 해 연말에 내가 내년부터는 중학생만 맡겠다고 했다. 물론 최저시급이기 때문에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고 5시부터 9시 수업에 앞에 한두 시간은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이 있았다.
소묘수업엔 입시를 앞둔 중학교 3학년이 2명, 2학년이 2명이었고, 예중반으로 초등 5~6학년이 4명 정도 있었다. 예중반은 물론 예중을 가겠다고 정말 마음먹은 아이들은 아니고, 갈 수도 있으니 소묘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원장선생님이 내 수업에 밀어 넣은 아이들이었다.
내가 그 학원을 처음 간 게 7월인가 8월인가 그랬기 때문에 그해에 입시를 해야 하는 중3 두 명이 제일 문제였다. A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려서 나름 손 빠르게 정물소묘를 그려냈는데 기본기가 너무 없었다. 정물을 보고 그리는 기본이 안되어 있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됐다. 지방의 예고는 그다지 높은 수준의 소묘를 요구하지 않아서 그렇게 그려도 합격이 가능하긴 할거 같은데 6학년때부터 그림을 그려온 아이를 두세 달 만에 내 스타일로 바꾸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투시법과 관찰해 그리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면서도 자기 스타일로 그리도록 뒀다. 다른 한 명인 B는 소묘를 거의 해보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에 기초부터 탄탄하게 가르칠 수 있었다. 이 애들이 목적으로 두는 학교는 성적이 중간이상이면 그림은 그냥 뭘 그린건지 알아볼 정도로만 그려도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경험이 없던 나는 내심 떨렸다.
성실한 학생이었던 B의 그림은 빠르게 늘었다. 학원 밖, 게시판에 새로운 소묘들이 걸렸고 4명의 예비 입시생이 더 왔다. 첫해에 두 명의 입시생은 무난하게 합격했고 다음 해 새로 입시생이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즐거웠다. 예고에 갈건 아니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등록한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아이들도 두어 명 있었고 내 수업이 자리 잡아갔다. 어떤 아이는 나와의 수업을 어려워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만두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그만뒀다가 다시 오기도 했고 어쨌든 내가 지도했던 아이들이 모두 예고에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내 학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