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그 부장과는 같은 공간에 있기 힘들다고 생각한 끝에 휴직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휴직과는 별개로 부당했던 부장의 언행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예전에는 그보다 훨씬 심하게 갑질을 해대는 상사도 많이 겪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씩씩하던 내가 이렇게 아프게 된 건 나를 부당하게 대했던 그 사람들에게 항의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해서라고 생각한다. 그저 튀기 싫어서, 누구에게 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나만 가만있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고 참고 넘긴 일들이 하나씩 내 안에 쌓여서 결국 폭발하게 된 거다.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는데 더 이상 그렇게 늙어가긴 싫었고 자녀들에게 용기 있고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애기들이 훗날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 엄마가 예전에 했듯이 그에 맞서 행동하라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직장 괴롭힘 신고를 하기로 결심했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직장 괴롭힘 신고를 하고 싶은데요.
조직마다 한 명씩 있는 고충 상담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직장 괴롭힘에 대해 그가 교육을 한 적도 있어서 그가 우리 본부의 고충상담 담당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카톡 옆에 '1'이라는 숫자가 없어진 지 오랜데 한참 후에 전화가 왔다. 그는 평소랑은 약간 달랐다. 원래 그렇게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해는 하지 말라면서 며칠 후면 워크숍이 있는데, 지금 이 상담을 진행하게 되면 그 워크숍 때 차질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워크숍 이후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이런 상담 요청을 받아보는 것이 처음이라며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처음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주기적으로 직장 괴롭힘 신고에 대해 교육자료를 공지하기에 그것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내가 이렇게 직접 그걸 이용하려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항의를 할 마음도, 그리고 그럴 기운도 없어서 알겠다고 하고 그다음 주에 만나서 상담을 하자고 마무리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차장에게 카톡을 보내는 것에 나름 많은 용기를 낸 거였는데, 그렇게 거절 아닌 거절을 받게 되니 좌절감이 살짝 들었던 것 같다.
그 며칠의 상담 지연이 이렇게 큰 마음의 동요를 일으킬 줄은 그땐 알지 못했다.
며칠 동안 애기들이랑 예전에 계획해두었던 짧은 여행도 다녀오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굳건했던 직장 괴롭힘 신고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다. 그 일을 떠올리고 부장의 부당함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그때의 감정들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아지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신고를 하려고 하나하나 기억해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공황장애 증상이 더욱 심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쉬었다가 반복하기를 여러 번 해도 매번 같다는 것을 느끼자 나를 위해서는 잠시 그곳, 그 사람 생각에서 당분간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주에 예정대로 고충 상담자가 내 회사 메일로 신고양식을 보냈으니 확인하라고 연락을 했다. 이미 그가 연락하기 전에 신고를 잠시 접어두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보냈다는 메일이 수신이 안 되었다.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너무 괴로워서 당장은 상담이 어려울 것 같으니, 마음의 정리가 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노라고 했고 그는 알았다고 했다.
나는 신고보다 내 건강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회복이 좀 된 이후에 부장에 대한 신고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 알았다고 그가 답변을 하기에 나는 그가 내가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려 줄줄 알았다. 그런데 성실한 그 고충 담당자는 나와 생각이 전혀 달랐나 보다. 그는 상담 요청을 받고 진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찝찝함을 느꼈었나 보다.
그로부터 며칠도 안 돼 밤 9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상식적으로 밤늦은 시간, 그렇다고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그가 조직에서 어떤 업무를 하든 직원에게 그 시각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전화를 하더라도 안 받을 시간이었고, 게다가 휴대폰을 18시부터 무음으로 되게끔 설정해놓은 덕에 그 전화가 온 당시엔 알지도 못했다. 몇 분 뒤에 부재중 통화를 확인하고 카톡으로 전화한 목적을 묻자 한참 후에 답변이 왔다.
그가 답변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그가 보낸 사진 한 장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카톡으로 보내기 힘들다며 한글파일로 출력해서 그걸 사진으로 찍어 보낸 거였다. ㅎㅎㅎㅎ내가 받지 못했던 신고양식도 친절하게 같이 보냈다. 나도 직장 생활 할 만큼 해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 사진 속 A4용지 바탕에는 우리 회사 마크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몇 월 몇 일에 본인이 나에게 양식을 주어서 상담을 도우려고 했으나 메일이 안 갔고, 너가 미루자고 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본인의 역할이 있으니 자꾸 미루는 것보다 빨리 신고하고 처리하자는....
그걸 보고는 또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긴 나도 힘들지만 무서웠다고나 할까.. 그가 글로 쓴 말투는 형식적으로는 매우 정중하고 나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그가 나에게 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왜 그런 카톡을 보냈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혹시 나중에 상담 요청을 거부했다는 책임문제가 제기될까 봐 그걸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던 게 뻔히 보였다. 그가 사진 찍어 보낸 용지에 우리 회사 마크가 출력이 되었듯이 그렇게 늦은 시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워커홀릭인 그에게 나의 상담 요청은 미뤄진 일일 뿐이었다. 그에게 '차장님께 피해 가는 일 없도록 하겠다.'라고 안심을 시키고, 내 상담 요청이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라면 일단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라고 답변했다.
그의 카톡으로 시작된 나의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그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와 침대 맡에 멍하게 앉아있었다. 부장의 갑질이 힘들어서 신고하려고 손을 뻗었는데, 나의 손을 잡아줄 사람이 회사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때마침 자기 전에 인사를 하려고 내 방에 들어온 첫째를 보고 와락 끌어안자 뜨거운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큰 딸을 안고 한참을 그렇게 소리 없이 울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시도한 직장 괴롭힘 신고 계획은 신고양식에 잉크도 한 방울 못 묻히고 그렇게 허무하게 일단락되고 말았다. 다른 조직에서 고충 상담사를 오래 했던 회사동기는 반드시 꼭 신고하고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우리 조직의 초보 고충 상담사의 미숙한 일처리에 대해 비판했다. 그래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동기가 있다니... 이래서 동기가 좋긴 좋나 보다.^^ 무엇보다 때마침 내 눈앞에 나타난 첫째가 있어서 그나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직장 괴롭힘 신고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다. 나의 결심이 다시 서는 어느 날,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지금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해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