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위로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by 보물정원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계처럼 같은 원료를 투입하면 똑같은 제품이 완성되는 것과 달라서 서로의 성격, 그때의 상황, 말투나 표정 등 아주 사소한 것들에 의해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번에 회사에 못 가고 있자 팀장님들이 걱정을 하며 연락을 하시는데 매번 그게 나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질 않았던 것 같다.






정신과에서 받은 약 기운 때문인지, 정신없이 자고 있던 어느 날 휴대폰 벨소리에 잠이 깼다. 나의 직속 상사인 A팀장님이었다.




나 자기네 집 근처 다 왔는데, 잠깐 나올 수 있어?




헉!!! 우리집 근처라고? 정말 너무 놀라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주소를 총괄부서에 물어 확인하고 퇴근길에 우리집 근처에 오신 거였다. 민감한 개인정보의 보안 따위는 별로 지켜지지 않는 이 회사의 허술함은 뭐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렇지만 그날 느낀 감정은 불쾌감보다는 오히려 공포심에 가까웠다. '그럼 부장도 그런 식으로 우리집 주소를 알아서 날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얼마 동안엔 집에서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혹시 부장이 집 앞에 와있는 건 아닌지 두리번거리기도 했었다. ㅠㅠ 팀장님은 내가 공황장애에 걸려 회사에도 못 나오고 있으니, 검색을 해보셨다며 내가 부장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집 앞 카페에 앉아 마감시간까지 약기운인지 잠이 덜 깬 건지 정신이 몽롱한 채, 부장의 직장괴롭힘 정황들과 나의 그에 대한 불편한 감정 등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서로 교감이 된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나의 말들에 대해 '부장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거야.'라고 말하거나, 무엇보다 날 찾아오겠다는 그녀의 계획을 부장한테 이미 말했다고 했던 부분에서 특히 그랬다.




내가 그 팀장님이었다면, 정말 날 걱정해서 오신 거라면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장 때문에 내가 힘들어서 회사에 못 가고, 병에 걸렸다는데 어째서 그에게 우리집 방문 계획을 말한 걸까? 그래서 유치하지만 그때 나는 그녀가 부장의 편이고, 난 또 다른 적을 만난 기분조차 들었던 것 같다. '날 걱정해주는 듯 하지만 결국 부장의 입장에서 날 대하고 있구나.' 하는 서운함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될 대라 식으로 '부장한테 가셔서 제가 직장괴롭힘 신고할 테니까 소명이나 잘하라고 전해주세요.'라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그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한번 놀랐다. ㅎㅎ




그로부터 일주일쯤 지난 뒤에 팀장님으로부터 받은 카톡을 받고는 정말 부장도 그녀도 너무 싫어졌었다.




부장님이 자기한테 안부라도 묻고 싶어 하는데, 조심스러워하셔.



그전까지는 내가 회사를 안 가든 말든 연락 한 번 안 하던 사람이, 본인 때문에 내가 회사에 안 가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꿈쩍도 안 하던 사람이 직장괴롭힘 신고를 하겠다니까 안부를 묻겠단다. 안부를... 겁을 주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직장괴롭힘 신고 선포가 꽤 효력이 있었나 보다. ㅎㅎ 나는 팀장님한테 정색을 하면서 내가 왜 가해자 마음 편하자고 거기에 응해야 하냐고 부장 이야기를 나한테 전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본인의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하셨다. 나와 부장의 말들을 중간에 전달한 팀장님이 약간 미웠지만 그래도 나의 의견을 수용하고 바로 사과를 하셔서 마음이 풀어지긴 했다.






우리 부의 또 다른 B팀장님도 우리 직속 팀장인 A팀장님 못지않게 나를 걱정해주셨다. 오히려 직속 팀장님이 나의 고통을 전혀 모르던 때 이 팀장님은 언젠가부터 자꾸 점심을 한 번 같이 먹자고 제안했다. 몇 번 거절했는데도 자꾸 말씀을 하셔서 결국 응하기는 했는데, 그전에 계속 거절했던 이유는 점심에 개인적으로 하는 취미생활 등으로 바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형식적인 인사 외에는 서로 별로 말도 안 하는 사이였는데 부장이 나에게 심하게 뭐라고 했던 시점 이후, 정확히 부장으로 인한 나의 공황발작 증상이 발현된 그 시점 이후에 그녀가 그런 제안을 했었던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과 단 둘이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럽고, 그녀가 점심을 먹으면서 어떤 말을 할지 어느 정도는 예상이 되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그녀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 이후에도 내가 부장 때문에 회사에 안 가자 그런 식의 제안을 꾸준히 해왔다. 예를 들면 그녀가 주말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밭에 오라거나 어느 산자락 황톳길을 같이 걷자거나 본인이 좋아하는 카페에 가자는 등의 것들이었다. 누구의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하는 나는 그녀의 제안을 몇 번 받아들였다가 도저히 못 만나겠어서 취소하여 결국 그 점심식사 이후에는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같은 팀도 아니고 다른 팀 직원에게 그렇게 신경 써주는 게 그 팩트만 보자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라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그렇지만 그녀의 제안을 내가 불편해함을 넘어서 약간 불쾌하기도 했던 이유는 그녀가 더 이상의 연락을 안 하고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진 뒤, 그때의 일들을 곱씹어 생각해보자 명확하게 보였다.




전반적으로 그녀가 나에게 보인 위로의 태도들은 나를 위한 다기보다는 그녀 중심적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들은 대체로 정혜신 의사의 책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하지 말라는 '충조평판'의 성격을 띤 것들이었다. 내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녀의 잦은 권유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은 점심식사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안아줘야 한다, 부장에게 내 기분이 그 사람 때문에 나쁘다고 말해야 된다 등의 조언을 했다. 그때뿐만이 아니라 나는 부장한테 내 마음을 말할 생각이 없다고 내 의견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톡으로도 그게 이런 상황에 맞는 정답인 양 말하는 게 강요로까지 생각이 되었다. 예전에 본인이 심리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었나 본데 솔직히 예전부터 심리학 책들을 많이 읽은 나는 이미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뻔히 알겠는데 한 두 번 들은 수업으로 나에게 가르치려는 것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사람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내게 갑자기 연락을 자주 하며 나의 여행 목적지 같은 사적인 질문들을 묻는 다던지, 여행 가서 사진 좀 찍어서 보내라거나, 본인이 연차를 써가면서 날 만나자고 하던 모습들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주말에 자신의 밭으로 오라며 '새소리, 바람소리, 이런 게 난 좋더라.'와 같은 무슨 동화 속 소녀 같은 말을 하는 듯한 언어들도 거부감이 들게 했다. 또한 그녀가 자주 했던 말들 중 '이야기하고 싶으면 와. 내가 들어줄게.'라든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라고 했는데, 그렇잖아도 전화를 안 좋아하는 나보고 왜 친하지도 않은 그녀에게 전화를 하라고 하는 건지, 그리고 내가 왜 이야기를 하고 싶을 거라고 지레짐작으로 생각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중에서도 그녀에게 가장 화가 났던 일은 부장에게 나한테 안부 문자를 보내보라고 말했다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부장이 A팀장을 통해 그 뜻을 나에게 전달했던 것이었다. 그날 정색을 하며 나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약속 취소를 몇 번 하자 B팀장님도 기분이 상하셨는지 더 이상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팀장님 두 분의 인간적인 정인지, 아니면 팀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인지 나가떨어져 있는 직원을 도와주고 싶어서 손을 뻗어주신 그 의도는 훌륭하다. 그러나 때로는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녀들의 잦은 연락보다 다른 직원의 넷플릭스 시리즈를 추천해주던 그 한 마디 카톡이 위로가 되었다면 그녀들은 황당할까? 만약 그녀들이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에게 나에게 한 똑같은 방법을 적용했다면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을지도, 혹은 그런 말을 해줘서 감동이었다는 피드백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계기를 통해 더욱 돈독한 관계로 발전했을 수도 있을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사건의 원인제공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데 그녀들은 자꾸 나에게 가까이 가보라고 권하는 것 같아서 과장을 보태서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졌었던 것 같다. 한껏 예민해진 상태라 한동안은 휴대폰에 벨소리만 들어도 너무 힘들어서 무음으로 지내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회복이 된 상태라 다시 벨소리로 해놓았지만 말이다.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그녀들에게 정중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정말로 위로해주고 싶으시다면...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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