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계절과 함께 온 기적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될까? 극심한 슬픔이 몰려왔다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조금씩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안도하고,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회복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상대를 그리워하는 상태. 그래서 서로에게 상대의 부재를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상태) 생활을 해 나가는 부자에게 일어난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시작은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한 듯 보이는 부자로 시작한다. 하지만 여전히 서툰 그들의 아침상은 엄마 수아의 부재를 더욱 부각한다. 괜찮은 척 하지만 괜찮지 않음이 지배하는 식탁. 정리된 듯 하지만 구석구석 손을 타지 못해 방치되어 있는 물건들. 저녁때까지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들,
둘은 수아가 떠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을까? 영화는 그 시간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어느 정도 극복된 것처럼 보이는 슬픔’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서툰 식탁에서 상상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일상을 되찾을 때까지 우진과 지호가 견뎌야 했던 시간들을. 그리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아를 그리워하는지.
어느 날 거짓말처럼 수아가 돌아온다. 하지만 우진과 지호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들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점점 진짜 가족이 된다. 상실의 기억은 그들 스스로 전보다 더 사랑하고, 전보다 서로를 더 아끼게 한다. 마치 이 이야기가 언제 끝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려는 듯 최선을 다한다. 이 과정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잃어버렸던 부재의 기억 때문에 기적처럼 다시 찾은 그들은 현재가 너무나 아까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짧은 비의 계절 동안이지만 그들은 끝이 보이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사랑을 한다.
영화는 중간중간 우진과 수아의 과거를 보여준다. 풋풋하고 서툴렀던, 그래서 예뻤던 그 시절을. 고등학교부터 시작된 풋사랑. 대학에 가서야 홍구의 도움으로 겨우 고백을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두 사람. 첫 데이트. 수아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던 우진의 손. 하지만 두 사람의 이별이 예견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들이 사랑을 시작하는 장면부터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들의 첫 번째 이별은 수영을 하던 우진이 트라우마로 좋아하는 수아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향에 남은 우진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수아는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산다. 우진은 수아를 보러 서울까지 가지만 수아가 다른 남자의 차에 타는 걸 보고 절망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수아가 돌아온다. 그리고 말한다. “아무 걱정하지 마. 우린 잘 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수아는 정말로 알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잘 해나갈 것임을. 하지만 우진은 모른다. 수아의 이 선택이 죽음을 넘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인생을 다시 살아도 나는 당신을 선택하겠다는 큰 고백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지호를 낳는다.
영화에서는 수아가 죽은 이유에 대해 ‘몸이 약했다’라는 애매한 이유를 제시한다. 지호는 엄마가 자기를 낳아서 건강이 나빠졌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우진은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수아 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남겨진 시간들을 살아간다. 두 사람 다 수아에 대해 일종의 부채감이 있는 샘이다. 어쩌면 이 기적은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필요했던 그들만의 동화였던 것은 아닐까? 수아는 우진과 지호와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모든 시간을 사랑합니다. 즐거운 인생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지호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엄마는 100년을 살았어도 지호 없이는 행복하지 않아.’ 두 사람은 수아의 이 말로 앞으로 를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수아가 이 곳에 온 건 어쩌면 자신 없이 잘 버텨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앞으로의 시간들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용기를 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이별을 한다. 처음 수아를 잃을 때와는 달리 조금은 성숙한 이별을…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수아가 떠난 것을 이해하고 싶었던, 그리고 자신이 이 슬픔을 어떻게 버텨나가야 할지 알고 싶었던 우진과 지호의 환상은 아니었을까? (물론 영화가 홍구라는 캐릭터가 수아를 목격함으로써 이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가 아님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러므로 감독의 의도는 절대 아니었던 게 확실하지만. 어쩌면 허구가 아니어야 지호의 학교에서 발표회 장면 등이 감동을 선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만약 내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나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해서 재미있는 지점을 많이 찾아내려고 노력했을 거라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일본 영화로 먼저 접했던 이야기였다. 그때 기억나는 건 참 예뻤던 다케우치 유코와 노오란 해바라기 밭. 그리고 창문에 매달려있던 테루테루보즈다. 다시 리메이크된 우리나라 영화도 예쁜 영상과 사랑스럽운 배우들로 스크린을 채우니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풍경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영화. 오랜만에 마음이 꽤나 촉촉해졌다. 비의 계절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