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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둘 Nov 29. 2020

어쨌든 태어났고 살기 시작했다.

태어나기 전에 선택권이 있었다면 지금의 삶을 선택했을까요? 


아마도 이 말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꿈꾸며 살고 싶었던 삶이 지금의 삶이라면 그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이 글을 읽는 분 중 그렇게 행복한 분은 몇 명이나 될까요? 

과학적으로 보면 내가 이 삶을 선택한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 몸은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두 세포가 만난 날, 나는 우연히 생겼고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아는 과학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환생을 믿는 티베트 불교 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합방을 할 때 네 영혼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영혼이 부모님을 선택해서 이렇게 살게 된 것이라는 것이지요. 진실은 알 수가 없지만 이 말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합니다. 내 삶이 통째로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태어나게 했으면 잘 키울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부모 탓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어쨌든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든 내가 살기 싫었던 삶이든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 삶이 내 것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기쁨도 슬픔도 쾌락도 고통도 내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 삶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순간, 내 삶은 완전히 내 책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100% 내 책임이 맞다면 나는 변명할 구실이 전혀 없다는 쓰라린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리상담을 처음 찾아오는 이유가 다 이것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리상담을 받는 분들을 내담자(來談者)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내담자들이 첫 번째 이야기하는 부분이 바로 책임에 관한 부분입니다. 누구랑 무슨 일을 겪었던 사정은 각자 다르지만 처음에 하고 싶은 말은 대동소이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때요? 어떻게 그 인간은 그럴 수가 있지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니죠? 내 책임이 아니잖아요? 네? 얼른 그렇다고 하세요!” 

불꽃 튀는 감정을 뿜어내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부터 당신 책임이 맞다고 돌직구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책임이라고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 내담자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상담자한테 ‘그건 당신 잘못이 맞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상담실을 찾지는 않았겠지요. 아무리 내 잘못이 있더라도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받는 것은 쓰라린 일입니다. 내담자는 무엇보다도 위로를 받고 싶어서 상담실을 찾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살다 보니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클 때는 그것이 내 잘못과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더 나아가 타인에게 내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을 넘어 다들 내 이야기를 승인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럴 때 우리는 아직 젖병을 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리적으로는 이유식을 먹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위로와 공감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는 젖병을 물어도 좋습니다. 어른도 몸이 너무 아파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 미음을 먹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미음이 맛있다고 계속해서 미음을 먹는 어른은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내가 인정받고 승인받는 것에만 머문다면 몸이 다 나았는데도 젖병을 물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언젠가는 젖병을 뿌리치고 어른답게 스스로 숟가락질과 젓가락질을 하는 날이 와야 합니다. 내 삶이 드디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것이지요. 좋든 싫든 어쨌든 태어났고 이게 내 삶이구나!


내 삶의 더 많은 부분을 내가 소유하게 되면서 내 책임도 더 많이 인정하게 됩니다. 내 책임을 인정할수록 동전의 양면처럼 내 마음이 오히려 자유로워집니다. 내 책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의 빚을 스스로 탕감해 나가는 것이지요. 마음의 빚이 줄어드니 얼마나 가뿐하겠어요. 이제 젖병을 떼고 스스로 밥상을 차려서 내 손으로 내 밥을 떠먹는 셈입니다. 오랫동안 젖병을 찾던 사람은 그 밥맛을 보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거 밥 맛 참 좋네! 이 맛을 몰랐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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