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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둘 Nov 29. 2020

경계, 불편한 타인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


벌써 5년 전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대전에서 수원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의 뒷바퀴 근처의 좌석이라 공간이 약간 좁고 자리가 좀 불편했지요. 불편하게 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 봤는데 뒷자리에는 아기 엄마가 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 아이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 엄마를 보니 더 눈길이 갔습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눈길도 안 갔을 텐데. 우리 애를 낳고 보니 신기하게도 아기들만 보면 한 번 더 바라보게 되고 그 부모들에 대해서 인류애를 느끼게 됐지요. 그래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듯해졌습니다. 


그러나 웬걸.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잠이 들라고 하면 아기가 칭얼대고 울면서 잠을 깨웠습니다. 아기가 칭얼대면 엄마는 더 열심히 달래니 바로 앞자리에 앉은 저에게는 그 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됐습니다. 안 그래도 불편한 뒷좌석인데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지니 점점 짜증이 났습니다. 속으로 ‘잘 좀 달래지’하고 생각하다가 ‘아기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요새 누가 갓난애를 데리고 공공버스에 타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짜증이 사그라들었습니다. 아기 엄마도 저렇게 어린 아기를 데리고 불편하게 버스에 타고 싶지는 않았겠지요. 아기를 챙길 짐 보따리 하나 가득 안고 아기를 또 안고서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버스에 타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요. 나름의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연민의 감정이 올라오면서 인류애가 다시 회복됐습니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짜증내고 비난했던 마음에 죄책감이 들면서 말이지요. 버스가 수원에 도착하여 내리는 길에 한 마디 하고 싶어서 뒤를 돌아봤습니다. ‘나도 그만한 애가 있어요. 키우느라 참 힘드시죠?’ 하지만 괜히 쑥스러워서 결국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습니다. 


그 말을 정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지 쑥스러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괜히 그 말을 했다가 비꼬는 것으로 들리지는 않을까,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생활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요즘의 예의이자 문화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것이지요.


나중에 그 일을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는데 모두 자기라도 아무 말하지 않고 버스에서 내렸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히려 관심을 주고 말하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할 정도였지요. 그때 우리는 타인과의 마주침을 최소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약간은 서글퍼졌습니다. 


과거에는 버스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내가 앉은 자리 옆에 서 있으면 앉아 있는 내가 그 물건을 받아주는 것이 당연시됐습니다. 보기 흔한 풍경이었지요. 하지만 요새는 그렇게 짐을 대신 들어주려고 했다가는 오해부터 사지 않을까 조심스럽지요. 과거의 풍습이 옳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과도 서로 정을 나누는 것이 당연했던 만큼 타인과 희미하고 약한 경계 때문에 여러 부작용도 많았지요. 그래서 점점 나와 타인 사이에 거리를 두게 되고 남과 나의 다른 점을 구별하며 내가 어떤 존재인지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나'의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을 돌아봐도 '나'의 풍년 시대입니다. 모든 매체에서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하나? 나는 무엇을 먹고 싶고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가? 끊임없이 나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키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기 힘들어 합니다. '나'의 풍년 시대건만 과거 어느 때보다 나란 존재에 대해 불확신과 불안감을 안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자의식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는 희한하게도 자아를 찾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외로워합니다. 나 자신을 지키고 찾으려고 온갖 생각과 행동을 다 해봤는데 오히려 모호해집니다. 나는 정말 누구일까요?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안에서 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단절시켜 놓고 나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사막의 신기루를 잡으려는 헛된 노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 타인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긴장감 속에 경계가 발생하고 그 경계를 확인하면서 '나는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걸 싫어하는 구나.'하고 자기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인과의 마주침을 최소화하고 사람들과의 연결 고리를 약화시킴으로써 타인과 나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을 경험할 일이 줄어듭니다. 결국 내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수 없게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한 감각이 모호해지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남과 함께 어울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다른 이유도 아닌 나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예전에 라디오에서 이런 인터뷰 내용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도시 정책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점점 한적한 외곽으로 몰리고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의 관리자가 라디오에 출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분들이 원하는 것은 최고의 복지시설이나 서비스가 아닙니다. 그 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속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타인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타인이란 불편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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