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말이 유행하지도 않았던 그 옛날. 팔팔하게 젊었던 그 시절에 이생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몸도 지금보다 성하고 체력도 더 좋았던 그때, 이생망의 감각은 분명했습니다. 이번 생은 망한 거다 이미!
따듯한 봄이 와도 얼어 죽을 것 같던 그 친구를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넌 지금 그럴 테지.
그치만 그러고도 한참을 더 살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잘 살 준비를 하는 게 좋을걸?
아무리 사는 재미가 없어도 살아진 세월을 지나서 그 친구도 알게 되었습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과 봄에는 웬만해서는 얼어죽지 않는다는 것과 겨울 뒤의 봄은 참 따듯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슥. 그 친구가 점차 어떻게 바뀌었는지 나누어 봅니다.
어제 엊그제 수능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비슷한 느낌을 느꼈던 시절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생망. 팔팔한 청춘이 빛을 바라가던 날들.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 동굴 속으로 자꾸만 들어가려던 날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는 참으로 아깝다는 말의 표본으로 살던 날들. 그런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아 다시 생각해도 창피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살짝 저린 느낌도 있지만 그때처럼 청승맞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를 들면서 점차 젊음을 되찾는 것 같습니다. 신체는 여기저기 부상을 당하고 아픈 곳이 많아지고 있는데 정신은 젊어지고 있습니다. 서글프네요. 젊음의 가치를 젊었을 때는 왜 알지 못했는가. 학생 때가 좋은 거라는 희대의 꼰대 명언이 정말 맞는 말이라는 걸 이 아저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젊은 날의 그 친구여.
그 친구는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봄바람, 여름바람, 가을바람, 겨울바람 가리지 않고 바람만 불면 줏대가 흔들릴 준비가 되어 있던 가냘픔. 그 친구를 어떻게 잘 구슬리고 산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기도 했지요. 그땐 그랬던 그 친구.
그 친구도 어쨌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았고 나이를 먹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 경이로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 친구의 경우 나이를 먹으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 친구는 삶이 유달리 혼란스러울 때면 어떤 일을 하곤 했습니다. 대청소, 빡세게 운동하기, 몇 시간씩 일기 쓰기 등등.
그중에 나중에 루틴으로 잡힌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매일 청소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괴로울 때면 청소를 열심히 했던 덕에 지금도 괜스레 기분이 처질 것 같으면 청소를 합니다. 청소를 하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지요. 청소를 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고 청소를 하고 나서도 기분이 좋아지고. 좋아지고 좋아지고 자꾸 좋아지고. 뭐 이런 완벽한 해결책이 있는지.
언젠가 스님의 청소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님의 청소법이라 그런지 이 책의 느낌은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정갈하게 정돈된 방에 달빛에 환히 들어와 깨달음이 밝아지는구나! 어쨌든 약간이라도 청소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이 책. 담백한 맛이 일품입니다. 그중에 한 대목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쁘면
방 한 칸만
5분만
청소하면 된다.
아뿔싸. 청소라는 것은 늘 온 집안을 한꺼번에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번 청소도구를 들었으면 구석구석 다 쓸고 닦아야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허, 이 또한 몹쓸 완벽주의! 청소의 달인 스님 왈, 일상이 바쁠 때는 방 한 칸만 청소하면 되느니라. 그건 5분 밖에 안 걸리느니라. 너 5분도 없니?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이었습니다. 5분간 방을 쓸고 닦는 것, 그게 뭐 대단한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가능하면 단 5분이라도 매일 청소를 합니다. 방 한 칸만 정리해도 아무 죄책감 없이 오늘의 청소를 끝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뒷간에 갔다가 뒤를 안 닦은 듯 뭔가 미진한 느낌은 바이바이~ 오늘은 이 방만 청소해도 됩니다. 내일은 다른 방을 청소하면 되니까요. 오늘은 방 한 칸, 창문 한 쪽, 책상 위만 청소해도 충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놀랍도록 단순하고 완벽한 해법이라니.
기분이 안 좋아지더라도 아주 추락하지 않게 된 것은 이런 사소한 청소가 단단히 한몫했습니다. 청소마저 할 시간이 없을 때에는 -거의 다 게으름을 피워서 그럴 때이긴 하지만- 이불이라도 갭니다. 현실의 사건이 매일 같이 닥쳐오는 아저씨의 삶에서는 청승 떨 틈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택합니다. 단 5분이라도 좋다. 청소를 하자!
이미 그 친구의 삶으로 인해 지금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볼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저씨는 생각합니다. 더 나아지지는 않더라도 더 악화시키지는 말자.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악화만 시켰던 내가 지겹다. 이렇게 평생을 살 것인가? 누군가 나에게 평생 이렇게 살라고 강요한다면? 으악, 참을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이미 망했던 삶.
더는 구질구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이 아저씨는 매일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청소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