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수능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수능을 떠올리면 군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한 문제. 군대에서 고립무원처럼 힘들었던 시절만큼이나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를 잡은 그것. 아 무시무시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다니.
그 문제가 나에게 준 교훈. 정말 뼈를 맞은 듯 아프게 배운 교훈. 그러고도 수차례 복습이 필요했고 지금도 끝없는 실습이 필요한 교훈.
과거를 현재로 연장하지 않기
아직도 연습 중인 이 교훈을 수능 시즌을 맞이해서 되새겨 봅니다.
기억이 납니다. 몇 번이나 복기를 한 것인지 시험 지면의 어느 위치에 있던 문제였는지, 어떤 문제였는지도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미련하기 짝이 없다니. 복기와 후회를 수도 없이 많이 해서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 지난 지금도 그 문제가 기억이 납니다.
수능 2교시, 수학 시간.
문제 중에 가장 까다로워 보이는 그 문제를 잡고 풀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을 풀었는데 보기 중에 답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그래도 엄청난 긴장 속에 시험을 보고 있는데 더욱 긴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더 천천히 다시 풀었는데 보기 중에 답이 또 없었습니다. 이럴 수가. 이미 시간은 엄청 지나가고 있는데. 이대로는 억울하다, 이렇게 답이 안 나올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세 번째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비로소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엄청나게 모자랐던 관계로 나머지 많은 문항들을 그냥 찍고 제출했습니다.
착잡한 마음에 뭔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망한 수능, 그냥 그대로 고사장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떠날까 말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남아서 시험을 마쳤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떠나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짓입니다.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사는 건 이후의 삶에도 별 도움이 안 되었을 테니까요. 어쨌든.
나중에 답을 맞추어 보니 세 번이나 풀었던 그 문제도 결국 틀렸습니다. 세 번이나 공들여 푼 문제를 틀렸고 그로 인해 수많은 문제를 풀지도 못하고 찍었는데. 차라리 그 한 문제 포기했더라면 다른 수많은 문제를 맞출 수도 있었는데. 다시 한번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기억났던 그 문제. 단골 안주 메뉴처럼 시시때때로 기억이 나서 잠깐 가슴을 쓸고 지나갔습니다.
참 미련한 짓이었지요. 한번의 실패를,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수백 번 넘게 머릿속에서 재생시켰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과거에 파묻히게 된다는 것을. 애써 생각이 나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기도 했지만 이미 머릿속에서는 돌아가고 있는 그때 그 문제. 그러면서 나는 내 눈앞에 빤히 펼쳐지고 있는 삶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삶은 언제나 지금 흐르고 있는 것을.
이번에는 같은 맥락, 다른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친구 결혼식장에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만난 초중고 동창. 친구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분명 한때 같은 반 친구로 서로를 분명 의식했던 사이. 그런데 그 동창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얼굴은 알아보지만 이름은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순간에도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나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 동창을 의식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와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버릇처럼 과거를 수도 없이 되새김질하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현재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갔겠구나. 과거는 과거로 밀어놓고 그보다 훨씬 많은 현재의 경험을 축적해왔겠구나. 그로 인해 과거의 기억은 저 멀리 떠나 보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어쩌면 과거에 살고 있구나!
현재는 현재일 뿐.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라떼는'을 시전하거나 과거의 후회를 곱씹고 있을 때, 나는 과거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과거를 살면서 현재를 떠나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삶이고, 떠나 보내야 할 삶은 과거인데도 과거를 붙잡고 현재를 떠나 보냅니다.
우리가 과거를 곱씹는 것은 과거가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현재와 아무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라도 그렇게 자주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를 살려두고 과거가 떠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눈앞의 현실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스스로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말이지요.
과거를 정말 과거로 두고 싶다면, 시간에 대한 관념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늘 현재만이 존재하는 시간. 사실 과학자들도 이것이 진실이라고 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인간이 지어낸 허구적인 개념이라고 하지요.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완전히 사라지는 시간. 과거에 축적되는 것이 아닌 시간. 쌓이지 않고 그 순간 살고 그 순간 죽어 사라지는 시간. 철학자들은 이를 두고 '영원한 현재'라고 불렀습니다.
영원한 현재.
내가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공간은 현재입니다. 영원한 현재를 살 때 우리는 아무 사연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학창시절이 어땠든 친구관계가 어땠든 수능 점수가 어땠든 상관 없습니다. 과거는 개념에 불과하니까요. 내가 과거에 머물지 않으면 과거는 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허구의 시간입니다.
과거를 살고 싶지 않다면, 과거가 다시 반복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현재에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면 쌓아두지 않고 미루어두지 않으면 붙잡아 놓을 과거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과거가 없이도, 현재를 살면서 조건 없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