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삶. 사자 새끼 말고 사자가 되세요.
안녕하세요 선화 씨.
잘 지내셨나요? 편지를 쓰면서 상담에 아주 열성적으로 달려들던 키 큰 선화 씨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허리를 곧추 세운 자세부터 시작해서 어딘가 남성다운 늠름함. 밝게 웃는 표정에 뚝뚝 흘러넘치는 유식함. 세상의 모든 것을 독파해 버릴 듯한 자신감. 그런 굳센 기상은 상담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어서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며 한편으로 괜한 걱정을 해봅니다. 사람이 너무 변한 게 아닌가. 상담의 시작과 끝이 너무 다르다. 심리상담을 받고서 너무 뜻하지 않게 변한 것은 아닌지, 전과 달리 삶이 너무 심심해지지는 않았는지 우려 아닌 우려가 됩니다. 그리고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내담자가 상담 초기에 가져온 기대를 다 꺾어버린 이상한 상담. 당혹스러웠던 심리상담 끝에 처음 기대와는 너무 달랐지만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것을 얻어간다고 하셨지요. 때로 심리상담은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뜻하지 않은 유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제 자기계발은 완전히 끝났는지요? 선화 씨와의 상담 후에 기록한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붉고 화려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선화 씨에게서 받았던 인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라면 이 문장을 뽑고 싶습니다. 선화 씨를 만나는 내내 불꽃이 떠올랐습니다. 정처 없이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 솟아오르는 것 자체에 열중한 불꽃의 춤사위. 무엇을 태우려는지도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타오름.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열정을 쏟으며 살던 선화 씨의 삶을 보고 들으며 불꽃이 떠오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상담에 처음 왔을 당시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며 곧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셨지요. 남들은 돈이 없어서라도 못 듣는 유명한 자기계발 강의와 심리코칭을 섭렵한 이력도 말씀하셨고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계속한다는 말에 잠시 속으로 혀를 내둘렀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말끝에서는 인문철학 지식이 술술 흘러나왔지요. 상담실이라는 곳과는 어쩐지 분위기가 안 맞는 느낌. 당당한 자세와 반짝이는 눈빛. 상담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선화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분이 상담실을 도대체 왜 찾아온 것인지 점점 더 궁금해졌습니다.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선화 씨에게는 한 가지 수상한 점이 있었지요. 한 부자 셀럽에 대해 찬탄하는 이야기. 첫 회기부터 자본주의에서 승리했다는 셀럽에 대해 이야기를 꽤나 장황하게 늘어놓으셨지요. 셀럽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상하게도 선화 씨의 눈은 총명한 빛을 잃어갔습니다. 두 눈에서 마치 아무리 타올라도 목마른 불꽃을 보는 듯했습니다. 스스로의 타오름으로 인해 갈증을 재촉할 뿐인 불꽃. 그 셀럽처럼 되고 싶은데 온갖 자기계발을 도모해도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던 말. 그래서 심리상담을 찾아왔다는 말을 들으며 선화 씨가 심리상담에 대해 기대한 바가 반드시 꺾일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자기계발을 할 때의 맹렬한 기세로 심리상담에 몰두한다면 그 기대가 반드시 꺾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꺾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치유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심리상담을 통해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고치려는 선화 씨의 노력은 남달랐습니다. 안 풀리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 듯 문제를 붙잡고 끝까지 늘어지는 열성은 다른 내담자에게서는 보기 힘든 면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이해하셨지만 다만 그 문제풀이의 의도가 아쉬울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고쳐서 그 우상처럼 되겠다는 의도는 아무리 자기 문제를 잘 푼다고 해도 달성하지 못할 목표였지요.
상담자와 내담자가 가슴이 맞닿지 않을 때 심리상담은 진척을 보이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심리적인 문제만 해결하면 될 것 같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해결책은 엉뚱하게도 문제 자체보다는 문제를 지닌 사람에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자신이 바뀌지 않고는 무슨 수를 써도 문제가 완전히 풀리지 않는 것이지요. 문제가 문제가 아닌, 이런 아이러니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런 이해가 우리의 상담에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참 오래 걸렸지요. 넉 달이 넘는 시간이 유달리 탁월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선화 씨에게는 더욱더 긴 시간이었을 테지요. 일순간 사라지는 불꽃의 단말마처럼 쏟아 부은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선화 씨가 처음으로 내비친 괴로움. 그 순간만큼 인간미가 넘쳤던 선화 씨를 만난 적이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마침 그 셀럽이 크게 구설수에 오른 그날은 상담 시간에 줄곧 인용하던 셀럽의 말보다 상담자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인 첫날이기도 했지요. 우리가 가슴으로 만나기 시작한 그날 이후 한동안 느꼈던 그 맑은 고통을 기억하시지요?
불꽃은 안이 비어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열정적인 불꽃이라 해도 그 안은 비어 있습니다. 그 안에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불의 한가운데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에는 열기만이 있을 뿐 다른 무엇도 없습니다. 자기 속을 비워둔 채 겉을 태우는 불꽃은 화려하기는 해도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제 화려함에 취해 맹목적으로 타오르다가 길을 잃기나 쉽지요.
마지막 보루였던 심리상담을 통해서도 결코 그 셀럽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자각하며 느낀 맑은 고통은 시원한 빗줄기처럼 불길을 식혔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타오르던 불꽃의 속이 실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텅 빈 심장에서 만난 슬픔. 그 우상을 떠나보내는 것보다 내 심장이 비어 있다는 것은 더 큰 슬픔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넘치는 자신감은 본래 선화 씨의 것이었는지 그 슬픔을 너무 아쉽지 않게 떠나보내도록 도와주었지요. 허망한 노력을 뒤로 하는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아름다워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불길이 걷힌 뒤에 그윽하게 살아있는 불씨.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듯이 선화 씨다움 덕분에 그동안의 자기 모습을 직시하고 불길이 식은 후에 남은 아름다운 잉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상담을 종결한 후에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식기 시작한 열정은 아름답다. 열정이 없이도 본디 아름답다.’ 상담 이후 선화 씨가 어떤 삶을 살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남아있던 잉걸에 어떤 불꽃을 당겼는지요. 심리상담을 마지막으로 자기계발을 끝내겠다고 하셨던 선화 씨. 그 불꽃이 무엇이든 다른 누구도 아닌 선화 씨의 심장에 당겨진 불꽃이길 기원합니다.
▼ 선화 씨와의 상담 사례는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